[독립운동과 인천·(13)]윤응념과 인천사건

군자금 모집하다 옥살이… 역사속 사라진 항일운동가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05-23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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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의 결심공판 모습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3년 9월 19일자 기사의 사진(선두에 선 사람이 윤응념이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

황해도 출신 3·1운동 계기 임시정부 참여 1920년 교통국 참사로 임명돼
인천·섬 부호 상대 독립자금 수급役 사기꾼 많아 신분상징으로 권총 사용
강도 몰려 12년형 선고… '김마리아 망명' 주역 독립운동가 밀입국 돕기도
병보석후 중국으로 탈출 '행방묘연' 유공자 서훈 못받아 추가 조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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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초기 경기도경찰부는 인천과 주변 섬 지역의 부호들을 상대로 한 연쇄 강도사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일당이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이 사건은 이른바 '인천사건'으로 불리며 "인천 부근 일대의 부호를 전율케 한 사건"이라는 내용으로 신문에 대서 특필됐다.

강도죄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의 실체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해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하라는 밀명을 받고 활동한 임시정부 교통국 소속의 특파단이었다.

인천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모두 10명으로 총 책임자는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응념(1896~?). 그럼에도 윤응념은 인천사건의 다른 주역과 달리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했다.

인천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틈을 타 중국으로 도망간 뒤로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도 뒤로 밀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지만, 학계의 관심과 깊이 있는 연구는 미진하다.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윤응념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지만, 아직 국가보훈처는 그를 발굴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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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원들의 국내 진입 경로를 표시한 일제 보고서 '밀도항자의 경로에 관한 건'. 상하이→옌타이→웨이하이 등을 경유해 진남포 또는 황해도로 들어오는 경로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

윤응념이 이끌었던 인천사건의 배후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국내 각 지방과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연통제(聯通制)'라는 기구를 설치해 운영했다. 

 

이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의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연통제는 초기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1919년 7월 교통국이 설치돼 연통제를 계승했다. 

 

윤응념은 1920년 10월 5일 바로 이 교통국의 참사로 임명돼 독립운동가들의 밀입국을 돕고, 문서(정보)를 주고받거나 독립자금의 원활한 수급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

1896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윤응념은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0대 후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 선천 등지에서 수학하던 그는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가려 했으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가담할 뜻을 갖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는 당시 임시의정원 비서였던 김정목의 소개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윤응념은 교통국 참사로 임명된 직후 조선독립을 선전하기 위해 발행한 독립신문과 잡지 신한청년을 국내로 몰래 들여와 배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고향인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수천부의 독립신문을 배포하며 첫 임무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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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부터)임시정부가 군자금 모집 때 사용한 공채들과 1919년 조선독립군사령부가 발행한 군자금 납입 명령서·봉투. /독립기념관 제공

그에게 주어진 다른 임무는 바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이었다.

 

임시정부는 지금의 주민세와 같은 인구세 등을 걷어 국내 지방조직을 통해 자금을 공급받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되자 임시정부 요원을 직접 보내 모집을 맡겼다. 

 

윤응념은 1922년 4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인천 장봉도, 시도, 영종도, 대부도 등지를 다니며 지역 부호를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

이들은 즉석에서 돈으로 받기도 했고,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이 지난 4월 발간한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을 보면 독립공채의 이자는 연 100분의 5로 나라가 독립한 뒤 5년부터 30년 이내에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100원권, 500원권, 1천원권의 3종류였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임시정부가 인증한 여러 문서를 보여줬지만, 군자금 모집을 가장한 사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권총'을 신변 보호의 수단이자 신분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윤응념이 권총을 보여주며 군자금을 모집한 일은 결국 '강도사건'이 됐다. 

 

10명 중 1명은 도주했고 1923년 5월 경찰에 9명이 체포됐다. 이들이 훗날 자금 지원을 약속받은 금액을 빼고 실제 걷은 군자금은 561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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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념 검거 기사가 실린 1923년 5월 20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지면으로 윤응념을 '수괴'라고 표현했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

당시 판결문을 보면 윤응념은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대해서는 시인했으나 강도에 대해서는 "위협이나 공갈은 없었다. 피해자에게 물어봐도 알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가 권총을 소지했다는 것만으로 강도사건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윤응념은 그러나 결국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른 동지들도 징역 1년 6월~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인천사건이 발생한 이후 여성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 망명 사건의 주역이 바로 윤응념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나게 됐다. 이는 일본 경찰이 윤응념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는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외에도 국내와 중국을 연결하는 밀항 루트 확보를 담당했다. 

 

이를 위해선 중개 역할을 하는 외국인 상선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독립운동가들이 교통국이 확보한 선박에 타고 서해의 섬으로 몰래 이동해 있다가 외국 상선으로 갈아타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일제가 1921년 8월 20일 작성한 보고서 '밀도항자 경로에 관한 건'을 보면 윤응념이 관여했던 항로는 평안남도 남포항에서 출발해 중국의 옌타이 등지를 거쳐 상하이를 왕래하는 코스였다. 

 

중국 상인이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밀항을 중개했다. 김마리아 탈출도 바로 이런 방식을 택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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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념의 도움으로 망명에 성공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

김마리아는 서울 정신여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항일여성단체인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을 얻어 치료를 받던 중 상해 임시정부가 그녀의 탈출을 계획했다. 건강 회복은 곧 재수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교통국 참사인 윤응념이 상해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았다. 1921년 4월 중국인으로 위장해 국내에 잠입한 그는 그해 6월 서울에 있는 김마리아를 인천으로 몰래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인천과 황해도 사이의 한 섬으로 건너간 뒤 중국 웨이하이로 가는 소금장사 배로 갈아타고 망명했다. 

 

김마리아는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1932년 귀국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애국운동을 벌였다.

인천사건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윤응념은 1925년 5월 15일 수감 도중 폐병에 의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25일 가족에게는 재판소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뒤 중국으로 탈출했다. 

 

사흘 뒤 창춘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집으로 보낸 이후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객사했을 가능성도 있고, 신분을 감추고 아예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해방 이후 고향인 황해도 재령으로 돌아갔을 것이란 추측도 있지만, 윤응념 연구자들은 아직 북한에서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27년 1월 25일 동아일보에 실린 윤응념 관련 기사에서 부인 김항엽(당시 30세)은 "작년 9월 19일(음력) 나에게 재판소 호출이 있으니 가봐야겠다고 집을 나가서는 들어오지 않더니 그달 22일에 중국 창춘에서 편지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길림으로 간 모양인데 편지의 내용은 병만 나으면 또 조선으로 가겠다는 간단한 말이었는데 그 편지는 전부 경찰에서 압수하여갔지요. 그리고 요새 매일 형사가 와서 무엇을 조사하고 묻고 합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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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념의 군자금 모집 사건 판결문.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

진실·화해위원회는 윤응념 가족이 서울 통의동에 살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서울 종로구청에 옛 제적등본과 호적등본을 요청해 가족을 수소문하려 했지만, 구청 측은 관련 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

윤응념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윤응념과 군자금 모집을 했다가 체포돼 함께 옥살이를 했던 이호승(1878~1939)은 2006년 애족장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윤응념의 중국 탈출 이후 행적에 대한 추가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늦어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임시정부 연구자인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는 "윤응념은 징역 12년 형이라는 아주 무거운 형을 받았을 정도로 투쟁심이 강한 독립운동가였는데 중국 탈출 이후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며 "서훈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에 내부적으로 검토 대상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윤응념은 여기서 끝날 게 아니라 분명 더 많은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 미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훈격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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