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 칼럼]책을 정리하며

이영재

발행일 2019-05-28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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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종간호 모은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
발행인 온기 그대로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
10년 넘은 책꽂이, 반은 책·반은 먼지란 말
"지금 우리는 그런 먼지 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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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논설실장
책을 정리할 일이 생겼다. 문학청년의 패기는 모두 사라지고, 이사를 해도 이제 더는 책을 안고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책을 빼면 먼지가 풀풀 날았다. 하얀 목장갑이 금세 까매졌다. 딱히 정해진 날까지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책은 두 겹으로 꽂혀있다. 한 권을 빼면 그 뒤에 늙어서 더는 힘을 쓰지 못하는 병사처럼 빛바랜 책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보였다. 70년 중·후반을 풍미했던 월간지다. 가슴속에 바람이 싸하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책 정리고 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슬 퍼렇던 시절, 수원 교동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사서 모은 잡지다. 어렵사리 결호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발품을 판 덕분에 단 한 권의 결호 없이 온전히 모았다. 권당 200원에서 500원 값을 치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른 어느 책보다 '뿌리 깊은 나무'에 애정이 넘치는 것도 그래서다. 창간호를 읽다 보니 이래저래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1976년 3월에 창간된 한글 전용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는 '문화'의 힘을 앞세워 긴급조치를 발동한 독재에 항거하는 발행인 한창기의 온기가 그대로 녹아있다. 쌀을 한 움큼 쥐고 있는 손을 표지 사진으로 사용한 창간호는 기존의 잡지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43년 전 쓰인 한창기의 창간사는 이랬다. "우리가 '잘사는' 일은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과 무서움에서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을 슬기를 주는 저력 - 그것은 곧 문화입니다." 잡지는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모두 53권이 발행됐다.

80년대 초 수원역 지하상가 입구에는 '니꼴라'라는 서점이 있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판매금지된 책들은 이곳에서 구했다. 그때 사서 본 책들이 둘째 줄에서 먼지를 꼬박 뒤집어쓴 채 숨을 죽이며 있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신동엽의 '금강'을 비롯해 헝가리 공산당 인민위원이었던 게오르그 루카치의 저서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책들이다. 무엇에 홀렸던 것일까. 그때는 이런 책들을 밤새 탐독했다. 책 안에 '민주화로 가는 길'이 있는 줄 알았다. 다시 들춰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책마다 밑줄이 쳐있고, 뭐라고 썼는지 판독조차 하기 어려운 메모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80년대 우리는 '민주화의 열망'속에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책 속에 있으니 80년대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낡은 책에서 매운 최루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그것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달리는 친구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많은 사람이 그때의 기억을 지웠고,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한때는 집안에 김소월 윤동주 시집 한 권 정도는 갖고 있었다. 이제 그런 시대도 지났다. "요즘 무슨 책 읽어?"라고 묻는 시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 시대를 잊지 못하고 그때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꼰대'라고 손가락질을 받는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고민은 이 책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기증하려고 했지만, 도서관마다 난색을 보였다. 그러잖아도 있는 책들을 폐기해야 하는 처지라 더는 기증을 받지 못한다고 도서관 측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렇다고 분리수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물상에 넘기는 방법도 있지만, 이미 그런 경험을 한 친구는 "그거 사람이 할 짓이 못되더라. 어렸을 적 어른들이 집에서 키운 백구를 정이 붙을 만하니 개장수에 넘겼잖아. 그때 그 백구의 슬픈 눈빛을 봤지? 꼭 그 기분이야 "라고 말했다. 물론 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다시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뽀얀 먼지가 방안 가득 피어올랐다. "10년이 넘으면 책꽂이도 반은 책이고 반은 먼지"라고 했던 친구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먼지 속에서 살고 있다.

/이영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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