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투쟁 등 활약에 비해 기록없어
인천 강화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유두희(劉斗熙·1901~1945)는 고향에서조차 지워진 인물이다.
1920~40년대 인천에서 청소년단체와 노동단체 결성을 주도했고, 일제의 공산당 탄압으로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맞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 정권의 '레드콤플렉스' 속에서 오랜 기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한국인 자본가와 지주도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급진적 사상 때문에 민족주의 기반의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늘 외면을 당해왔다.
일제강점기 중후반 인천의 사회단체와 노동운동 때마다 빠지지 않고 유두희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의 연보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다.
강화 출신으로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기록을 과거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신사상(사회주의)을 흡수하고 단체를 조직할 수 있었는지 정확히 연구한 자료가 없다.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학적부를 통해 확인한 사실은 아니다.
대중강연에 나설 만큼의 지식인이었음은 분명하나 강의와 연설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부분도 못내 아쉽다. 어찌 이렇게 독립운동가 한 명의 흔적이 철저히 묻힐 수가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인천소년회 창립, 신간회 인천지회 조직, 4차 공산당 사건이 모두 항일 운동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인천 지역 사회의 관심과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1920~40년대 인천에서 청소년단체와 노동단체 결성을 주도했고, 일제의 공산당 탄압으로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맞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 정권의 '레드콤플렉스' 속에서 오랜 기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한국인 자본가와 지주도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급진적 사상 때문에 민족주의 기반의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늘 외면을 당해왔다.
일제강점기 중후반 인천의 사회단체와 노동운동 때마다 빠지지 않고 유두희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의 연보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다.
강화 출신으로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기록을 과거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신사상(사회주의)을 흡수하고 단체를 조직할 수 있었는지 정확히 연구한 자료가 없다.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학적부를 통해 확인한 사실은 아니다.
대중강연에 나설 만큼의 지식인이었음은 분명하나 강의와 연설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부분도 못내 아쉽다. 어찌 이렇게 독립운동가 한 명의 흔적이 철저히 묻힐 수가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인천소년회 창립, 신간회 인천지회 조직, 4차 공산당 사건이 모두 항일 운동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인천 지역 사회의 관심과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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