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잘리는 순간 삶을 떠난 '꽃다발'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며 숨거둬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릴땐 '비참'
꽃을 보고 지나치지않고 걸음 멈춰
찬찬한 눈길주는 사람이 나는 좋다
박소란 시인 |
실제로 꽃을 받아든 대부분은 웃는다. 소소하지만 풍족한 기쁨을 느낀다. 활짝 핀 꽃도 꽃이지만, 그걸 건네는 이의 뜻을 알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이토록 예쁜 걸 주시다니. 온 안면 근육을 동원해 감사를 표시한 뒤 꽃을 안고 돌아설 때면 어쩐지 사랑받는 사람이 된 기분. 버스를 기다리다가, 또는 상점에서 물건값을 치르다가 "어머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하고 누군가 알은체라도 하면 또 한 번 웃게 된다. 꽃이란 바로 그런 것.
그러나 꽃이라는 선물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사정 때문이겠지만, 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있다. 나 또한 이 그룹에 속한다. 나는 정말이지 꽃 선물만은 사양하고 싶다. 선물을 두고 이런저런 불평을 한다기보다, 세상에 하고많은 선물이 있다면 나는 되도록 그것이 식물이나 동물은 아니길 바란다. 하물며 목이 댕강 잘린 채 죽어가는 것이라면….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꽃은, 그러니까 꽃다발은 지금 막 삶을 떠난 존재다.
얼마 전의 일이다. 지방의 한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학생 대표가 연단에 선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이런 융숭한 대접이라니! 그걸 받아들고 어색하게 웃던 나는 이내 고민에 휩싸였다. 자, 이제 이 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여느 때의 나라면, 앉은 자리에 슬쩍 두고 가거나 꽃을 선호할 만한 일행에게 "가질래요?" 하고 줘버렸을 것이다. 선물한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애매하다. 구색에 가까운 것이라 해도 어린 학생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좀처럼 요령을 부릴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집까지 그 꽃을 품에 안고 왔다.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 내내, 행여 잎이라도 상할까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마치 로봇과도 같은 자세로 말이다.
진짜 문제는 이다음부터. 집에 돌아온 나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로 화병을 꺼내고 잽싸게 꽃다발의 포장을 풀었다. 그렇게 색색의 꽃들을 잘 간추려 병에 꽂고 나면 도리가 없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꽃들이 완전히 시들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침마다 화병의 물을 갈아주는 것뿐. 이때의 나는 중병으로 몸져누운 이의 병상을 지키는 무력한 보호자의 심정이 된다. (과장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하고 안색이 어두워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온 집안을 감도는 악취. 썩은 몸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레들. 그런 것들을 애써 모른 체하며 나는 전전긍긍한다. 차라리 어서 빨리 숨을 거두기를, 하고 바라는 한편 막상 임종의 순간이 닥치면 현실을 부정하며 어떤 기적을 갈구하듯 미련하게 군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은 더 난감해진다. 종량제 봉투에 마구잡이로 구겨 넣은 꽃을 쓰레기장에 내동댕이치는 일을 나는 해야만 하는데,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너무 별스러운가. 그런 것도 같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별스러운 사람이 수두룩하다. 말간 얼굴 뒤에 아픔을 감추고 살거나 삶의 가장 환한 순간에 끝을 생각하는 사람들. 꽃을 보며 새삼 아름다움의 이면을 떠올린다. 너무 쉽게 꽃을 선물하지 말 것. 하지만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조차 알 수 없는 내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지나치는 사람이 아니라 꽃 곁에 걸음을 멈추는 사람, 찬찬한 눈길로 그 꽃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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