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였던 '설죽' 스스로 한문 익혀
한시 167수나 남긴 빼어난 문장가
詩 품격 황진이·허난설헌과 '비견'
송강 정철 수제자로 유명한 '석전'
둘의 만남은 모두 시인이었기 때문
김윤배 시인 |
설죽은 봉화의 사대부, 석천(石泉) 권래(權來)의 시중을 드는 노비였다. 노비의 신분이었던 설죽이 어떻게 학문을 할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노비였음에도 15세가 될 때쯤 신분을 숨기고 명산대천을 떠돌며 사대부들과 교유했던 것을, 그녀가 남긴 시편으로 알 수 있다.
석전(1550~1615)은 송강 정철의 수제자로 꽤 알려진 당대의 시인이었다. 스승 정철의 잦은 유배를 보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석전은 상처 후 한강의 서호 부근에 서호정이라는 우거를 마련하고 술과 시로 세월을 보냈다. 오랜만에 봉화를 찾아 사대부들과 술자리를 가졌던 석전은, 설죽과의 첫 만남이 자신의 죽음을 노래한 만시여서 운명적인 조우였다. 설죽은 망설임 없이 석전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와 10여년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설죽은 생몰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십대 후반에 석전을 만나 이십대 후반에 홀로 남았을 것이다. 노비와 사대부의 만남이었지만 사십년 가까운 나이 차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시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설죽은 스스로 한문을 익힌 문장가로, 그녀가 남긴 한시는 모두 167수나 된다. 그녀의 시는 빼어난 서정과 품격을 보여 황진이와 허난설헌에 비견된다.
그녀는 석전을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사랑했다. '잠령은 안개와 노을의 주인이고/석전은 시의 주인이네/서로 만나 취하는 줄도 모르는데/양화진엔 달이 지네'라고 읊은 시가 '봉화 성석전'이다. 석전이 시의 주인이라 노래한 것은 최고의 시인이라는 의미다.
석전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쓴 시가 '님 떠난 후'다. 하강의 이미지가 시편을 압도하지만 서정 넘치는 시다. '낭군님 떠나간 뒤 소식이 끊어져/봄날 청루에 홀로 잠드네/촛불 꺼진 창에서 끝없이 우는데/두견새 울고 배꽃에 달이 지네'는 지극한 슬픔의 노래다. 우는 그녀를 따라 두견도 울고 배꽃에 달이 지면, 배꽃도 달도 따라 우는 것이리라. '비단 휘장'이라는 시편 또한 그녀의 외로움을 노래한다. '비단 휘장 닫아걸고 중문도 닫으니/모시적삼 소매에 눈물 흔적 보이네/옥굴레 금안장 임은 어디 계신지/삼경에 흐르는 눈물 감당할 수 없네.'로 마음이 아려온다.
석전과의 추억을 읊은 시가 '서호의 석전을 기억하며'다. '십년 동안 석전과 한가로이 벗하여 놀며/양자강 머리에서 취하여 몇 번이나 머물렀던가/임 떠난 뒤 오늘 홀로 찾아오니/옛 물가엔 마름꽃 향기만 가득하네'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녀의 사무치는 외로움은 서러운 춤사위가 되고 애절한 노랫가락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몇 해나 석전 없는 서호정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서호정을 떠나 호서지방의 관기로 일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여러 시편이 문헌에 남아 있다.
석전이 드러내놓고 설죽을 노래한 시편은 전해지지 않으나 '고운 사람'이라는 시는 설죽에게 헌정되었을 시다. '돈대에 이슬이 막 내려 가을빛 서렸기에/흥이 일어 생선과 채소 안주에 술을 찾았네./고운 여인이 붉은 단풍잎을 손에 들고 와/시골 늙은이 취한 얼굴 같다 웃으며 말하네.' 서호정 뒤로 나즈막한 돈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붉은 단풍잎을 들고 와 시골 늙은이 취한 얼굴 같다며 웃는 고운 여인은 설죽임에 틀림없다.
/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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