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날 슬픈 이야기 주고 받았는데
언제부턴가 의미가 점점 빛 바래
'잊혀진 전쟁'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
오늘은 '호국영령 이야기' 귀 기울이는 날
해마다 이날이 되면 우리는 슬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듣는 편이었다. 이제는 잊을 만한 한 평안도 사투리가 '방언'처럼 쏟아져 나왔다. 너무 생생해서 그 아비규환의 현장이 또 눈앞에 펼쳐졌다. 묘하다. 달달 외울 정도로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 속이 멍해지는 느낌을 받으니 말이다. "죽지 못해 살아남았다"로 이야기는 끝났다.
밥상머리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며 자랐던 아이는 이제 제 자식에게 아버지한테서 들었던 그 날의 슬픈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최첨단 아이맥스 돌비 서라운드로 영화를 감상하는 신세대 아이에게, 그것도 전해 들은 전쟁 이야기가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지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입을 다문다고 해서 주저리주저리 얽힌 그 숱한 사연을 담은 비극의 가족사와 남북 분단사를 두부 모처럼 잘라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해 6월의 마지막 일요일은 너무도 평온했다고 한다. 딸기를 씹는 것 같은 싱싱한 6월. 투명한 6월의 태양이 비치는 강물은 해조처럼 싱싱하게 흔들렸고, 붉은 장미처럼 생명의 열정이 만방에 꽃을 피운 6월이었다. 살살 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때로 소낙비를 몰고 오기도 하다가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햇빛을 뿌리기도 했다. 해방을 성취한 젊은이의 터질 것 같은 마음은 춘향이가 그네를 타듯이 한없이 펄럭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화단에 핀 붉은 장미가, 딸기를 담은 투명한 유리컵이, 어린이들이 타던 그네가 있던 놀이터의 평화가 순식간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6·25전쟁을 '역사의 고아'라고도 부른다. 3년 1개월 2일 동안 연인원 178만9천명의 미군이 참전해 3만6천여명이 전사했으나 역사적인 평가에서 철저하게 외면을 받고 있어서다. 승전도, 패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견도 있다. 분명한 건 미국은 6·25전쟁에 대한 준비도, 의지도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공원의 비문에는 '미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글귀를 적어 놓아 찾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우리 역시 언제부턴가 6·25 전쟁의 의미가 점점 빛이 바래고 있다. '한국전쟁'이라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 '내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재작년에 이어 지난 6일 현충원에서 열린 현충일 추념식에서 6·25전쟁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현충원에 잠든 대부분 영령이 6·25 전쟁 전사자들인데도 말이다. 오슬로를 방문해 행한 포럼 연설에서는 "독립 후 '한국 전쟁'을 겪고서도, 7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이라 했고, 스톡홀름 의회연설에서는 "반만년 역사에서 남북은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다"며 북의 남침으로 발발한 6· 25전쟁을 외면했다.
하지만 국군 전사자 13만명, 부상자 45만명, 10만명이 넘는 전쟁고아와 1천만명의 남북 이산가족이 발생한 6 ·25전쟁을, 그 아픈 역사를 하루아침에 지워버릴 수는 없다. 가족사처럼, 역사도 지운다고 말끔하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지우려다 남은 흔적이 더 흉하고 더 오래가는 법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6·25전쟁을 외면하고,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로 시작되는 '6·25 노래'가 더는 우리 사회에서 불리지 않는다면, 6·25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6·25 아침이다. 이어령은 '시간에 세우는 기념비'라는 글에서 "아, 6·25! 오수(午睡)를 거부하라"며 "6월 25일은 검은 구름과 천둥소리에 우리의 어린 것들이 피를 흘렸던 기억,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찢기는가를 듣는 것"이라고 적었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6·25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라 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의 그 슬픈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그런 날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언제부턴가 의미가 점점 빛 바래
'잊혀진 전쟁'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
오늘은 '호국영령 이야기' 귀 기울이는 날
이영재 논설실장 |
밥상머리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며 자랐던 아이는 이제 제 자식에게 아버지한테서 들었던 그 날의 슬픈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최첨단 아이맥스 돌비 서라운드로 영화를 감상하는 신세대 아이에게, 그것도 전해 들은 전쟁 이야기가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지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입을 다문다고 해서 주저리주저리 얽힌 그 숱한 사연을 담은 비극의 가족사와 남북 분단사를 두부 모처럼 잘라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해 6월의 마지막 일요일은 너무도 평온했다고 한다. 딸기를 씹는 것 같은 싱싱한 6월. 투명한 6월의 태양이 비치는 강물은 해조처럼 싱싱하게 흔들렸고, 붉은 장미처럼 생명의 열정이 만방에 꽃을 피운 6월이었다. 살살 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때로 소낙비를 몰고 오기도 하다가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햇빛을 뿌리기도 했다. 해방을 성취한 젊은이의 터질 것 같은 마음은 춘향이가 그네를 타듯이 한없이 펄럭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화단에 핀 붉은 장미가, 딸기를 담은 투명한 유리컵이, 어린이들이 타던 그네가 있던 놀이터의 평화가 순식간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6·25전쟁을 '역사의 고아'라고도 부른다. 3년 1개월 2일 동안 연인원 178만9천명의 미군이 참전해 3만6천여명이 전사했으나 역사적인 평가에서 철저하게 외면을 받고 있어서다. 승전도, 패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견도 있다. 분명한 건 미국은 6·25전쟁에 대한 준비도, 의지도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공원의 비문에는 '미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글귀를 적어 놓아 찾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우리 역시 언제부턴가 6·25 전쟁의 의미가 점점 빛이 바래고 있다. '한국전쟁'이라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 '내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재작년에 이어 지난 6일 현충원에서 열린 현충일 추념식에서 6·25전쟁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현충원에 잠든 대부분 영령이 6·25 전쟁 전사자들인데도 말이다. 오슬로를 방문해 행한 포럼 연설에서는 "독립 후 '한국 전쟁'을 겪고서도, 7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이라 했고, 스톡홀름 의회연설에서는 "반만년 역사에서 남북은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다"며 북의 남침으로 발발한 6· 25전쟁을 외면했다.
하지만 국군 전사자 13만명, 부상자 45만명, 10만명이 넘는 전쟁고아와 1천만명의 남북 이산가족이 발생한 6 ·25전쟁을, 그 아픈 역사를 하루아침에 지워버릴 수는 없다. 가족사처럼, 역사도 지운다고 말끔하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지우려다 남은 흔적이 더 흉하고 더 오래가는 법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6·25전쟁을 외면하고,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로 시작되는 '6·25 노래'가 더는 우리 사회에서 불리지 않는다면, 6·25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6·25 아침이다. 이어령은 '시간에 세우는 기념비'라는 글에서 "아, 6·25! 오수(午睡)를 거부하라"며 "6월 25일은 검은 구름과 천둥소리에 우리의 어린 것들이 피를 흘렸던 기억,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찢기는가를 듣는 것"이라고 적었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6·25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라 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의 그 슬픈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그런 날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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