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下)

"김구 선생 탈옥, 감리서 순검들이 도왔다"
1946년 인천 방문때 대중일보 보도
'일지'엔 없지만 새로운 자료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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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1876~1949)가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하다가 1898년 3월 탈옥할 때 감리서 순검(경찰)이 도왔다는 주장이 담긴 73년 전 신문 기사가 있다.

대중일보는 1946년 4월 17일자 2면에 '김구 주석 탈옥 삽화-사형수와 의협의 옥사(獄使)'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김구가 같은 달 15~16일 인천 방문 일정을 마치고 떠난 다음 날 보도한 기사다.

인천 방문 당시 김구는 내리교회에서 인천시민들에게 두 번의 인천 옥살이에 대해 술회했다. 대중일보 기사는 감리서 경무청 순검이던 김정곤, 박고님이 김구의 탈옥을 도왔다고 한다고 전했다.



김구가 나라를 위해 일본인을 죽였으며, 그의 인격에도 위압됐다는 이유라고 한다.

다만 두 순검이 "의복을 장만했다"거나 "탈옥 후 은신할 곳을 준비했다"는 기사 내용은 1947년 12월 출간된 '백범일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대중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정곤은 부두 하역 노동자인 '영신조' 조장으로 인천 부두 노동계에서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김정곤은 김구의 귀국을 알고 "자기 손으로 (탈)옥을 방조한 김창수가 즉 김구 선생인 것을 육감으로 간파했다"고 나온다.

투병 중이던 김정곤은 1946년 2월 딸을 통해 탈옥 사정을 쓴 편지를 '김창수 각하'라고 적은 봉투에 담아 김구 쪽에 전달했다.

다음 달 김구의 비서실장 신현상(1905 ~ 1950)에게 받은 답장이 신문에도 실렸다. 답장에는 '주석께옵서는 풍상 수천(수십의 오식으로 보임) 년에 과거를 일일이 기억키 어려우나 귀 서한의 제반 정사의 말씀은 실로 과거를 회고한다'고 쓰였다.

김구를 만나길 고대했던 김정곤은 김구의 인천 방문 2주일 전인 4월 1일 숨을 거뒀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 한 꼭지의 기사만 가지고는 실제로 김구의 탈옥에 순검이 도움을 줬는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본다.

'백범일지'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인천에 얽힌 백범 이야기를 새로이 확장해 볼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수많은 인천사람이 김구의 옥살이를 도왔다는 사실을 '백범일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대중일보 기사에서도 1946년 당시 인천사람들이 백범과의 인연을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는지 생각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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