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불에 잘 견디고 가벼운 편
부드럽고 마찰 강해 가공 편리
좀벌레도 잘 생기지 않아
장롱·문갑 등 가구재료 적합
공명 뛰어나 악기 만드는데 제격
화려한 벚꽃과 수수한 진달래, 노란 개나리 등 성대한 꽃들의 축제가 펼쳐지고 난 후 멀대처럼 키가 큰 오동나무가 한껏 곱게 꽃단장을 한다. 봄이 끝나고 여름의 문턱에 들어가기 전 오동나무는 튼튼한 줄기를 쭉 뻗어 올리고 초롱같은 보랏빛 꽃송이들을 매달아 놓아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단박에 마음을 빼앗아버린다.
오동나무는 현삼과에 속하는 큰 키의 낙엽이 지는 나무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 지방에 분포한다. 다 자라면 15m까지 크고 수피는 담갈색이며 암갈색의 거친 줄이 가로로 나 있다.
오각형의 큼직한 잎을 가진 오동나무는 우리나라에 자라는 1천여 종의 나무 중에서 잎사귀의 크기로 따지면 남부지방에 자라는 팔손이와 랭킹 일이등을 다툰다. 커다란 잎은 바람에 찢어지기 쉽고 해충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하나 더 많은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어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만들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키와 몸집을 키운다. 대략 1년에 키 1∼2.5m씩 초고속성장을 하는 오동나무는 15년에서 20년 정도면 제법 재목으로 쓸만하게 된다. 짧게는 40~50년, 길게는 100년 정도 되어야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목재로서 아주 쓸모있는 나무이다.
우리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었다. 딸이 성장하여 결혼할 나이가 되어 혼례 치를 날을 받으면 심었던 오동나무를 잘라 농짝이나 반닫이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딸을 보낼 때쯤 쓸 수 있을 정도로 생장속도가 빠르지만 자라는 속도에 비해 재질이 단단한 오동나무는 목재로서 장점이 많다. 습기와 불에 잘 견디는 편이며, 가볍고 부드러우며 마찰에 강해 가공이 쉬운 편이다. 또 잘 트지 않고 좀벌레도 잘 생기지 않아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기 아주 좋다. 당연히 쓰임새도 다양해 장롱이나 문갑, 소반 등 생활용품에 오동나무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아주 고급스럽고 무늬가 아름답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이 서민적이어서 생활도구를 만드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특히 오동나무는 소리를 전달하고 공명하는 힘이 뛰어나 가야금이나 거문고, 비파 등 악기를 만드는데 가장 적합하다.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 가실왕의 악사였던 우륵이 신라로 가서 가야금을 만든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그 가야금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도록 오동나무로 공명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동나무로 만든 가야금은 애절한 소리로 듣는 이에게 애수와 정한을 심어주고, 거문고는 둔탁하지 않으면서도 유장한 소리를 낸다.
성인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만큼 큰 오동나무잎은 토란잎과 함께 임시 우산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요즘 같은 장마철 비가 오락가락할 때 갑자기 맞이한 빗줄기를 피하는 데 아주 적격이었다. 무성하고 넓적한 오동나무잎 위로 투두둑거리며 장맛비가 떨어지면 빗소리는 더 시원하고 정감 있는 소리로 들려온다. 옛 어른들은 재래식 화장실에 오동잎 몇 장을 놔두어 벌레와 악취 제거에 이용하기도 했다. 오동나무는 잎이 바람에 스쳐 떨어지는 풍경으로 가을을 대표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자잘한 잎들이 우수수 흩날리며 떨어지는 일반 낙엽들과 달리 커다란 잎새가 허무하게 툭 떨어지는 오동잎을 보면 아무래도 가을을 연상하게 된다.
옛 문헌에는 관청이나 서원에 있는 오동나무를 함부로 베었다가 관리가 파직 등 중징계를 받은 기록이 눈에 띈다. 조선 명종 15년 영천군수 심의검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향교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벼슬에서 쫓겨났고, 현종 11년에는 남포현감 최양필이 향교의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파직당한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청렴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발포 만호로 재임 시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 진영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했으나 뜰의 오동나무도 나라의 재산이라며 단호히 거절했고 이순신 장군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파직되었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줄기와 껍질을 사용한다. 생약명은 동피 또는 백동피라 불리며 종기나 타박상, 피부염을 비롯해 여러 가지 증상의 치료에 사용했다.
/조성미 산림조합중앙회 홍보실장
부드럽고 마찰 강해 가공 편리
좀벌레도 잘 생기지 않아
장롱·문갑 등 가구재료 적합
공명 뛰어나 악기 만드는데 제격
조성미 산림조합중앙회 홍보실장 |
오동나무는 현삼과에 속하는 큰 키의 낙엽이 지는 나무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 지방에 분포한다. 다 자라면 15m까지 크고 수피는 담갈색이며 암갈색의 거친 줄이 가로로 나 있다.
오각형의 큼직한 잎을 가진 오동나무는 우리나라에 자라는 1천여 종의 나무 중에서 잎사귀의 크기로 따지면 남부지방에 자라는 팔손이와 랭킹 일이등을 다툰다. 커다란 잎은 바람에 찢어지기 쉽고 해충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하나 더 많은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어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만들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키와 몸집을 키운다. 대략 1년에 키 1∼2.5m씩 초고속성장을 하는 오동나무는 15년에서 20년 정도면 제법 재목으로 쓸만하게 된다. 짧게는 40~50년, 길게는 100년 정도 되어야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목재로서 아주 쓸모있는 나무이다.
우리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었다. 딸이 성장하여 결혼할 나이가 되어 혼례 치를 날을 받으면 심었던 오동나무를 잘라 농짝이나 반닫이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딸을 보낼 때쯤 쓸 수 있을 정도로 생장속도가 빠르지만 자라는 속도에 비해 재질이 단단한 오동나무는 목재로서 장점이 많다. 습기와 불에 잘 견디는 편이며, 가볍고 부드러우며 마찰에 강해 가공이 쉬운 편이다. 또 잘 트지 않고 좀벌레도 잘 생기지 않아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기 아주 좋다. 당연히 쓰임새도 다양해 장롱이나 문갑, 소반 등 생활용품에 오동나무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아주 고급스럽고 무늬가 아름답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이 서민적이어서 생활도구를 만드는 데 많이 이용되었다.
특히 오동나무는 소리를 전달하고 공명하는 힘이 뛰어나 가야금이나 거문고, 비파 등 악기를 만드는데 가장 적합하다.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 가실왕의 악사였던 우륵이 신라로 가서 가야금을 만든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그 가야금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도록 오동나무로 공명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동나무로 만든 가야금은 애절한 소리로 듣는 이에게 애수와 정한을 심어주고, 거문고는 둔탁하지 않으면서도 유장한 소리를 낸다.
성인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만큼 큰 오동나무잎은 토란잎과 함께 임시 우산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요즘 같은 장마철 비가 오락가락할 때 갑자기 맞이한 빗줄기를 피하는 데 아주 적격이었다. 무성하고 넓적한 오동나무잎 위로 투두둑거리며 장맛비가 떨어지면 빗소리는 더 시원하고 정감 있는 소리로 들려온다. 옛 어른들은 재래식 화장실에 오동잎 몇 장을 놔두어 벌레와 악취 제거에 이용하기도 했다. 오동나무는 잎이 바람에 스쳐 떨어지는 풍경으로 가을을 대표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자잘한 잎들이 우수수 흩날리며 떨어지는 일반 낙엽들과 달리 커다란 잎새가 허무하게 툭 떨어지는 오동잎을 보면 아무래도 가을을 연상하게 된다.
옛 문헌에는 관청이나 서원에 있는 오동나무를 함부로 베었다가 관리가 파직 등 중징계를 받은 기록이 눈에 띈다. 조선 명종 15년 영천군수 심의검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향교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벼슬에서 쫓겨났고, 현종 11년에는 남포현감 최양필이 향교의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파직당한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청렴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발포 만호로 재임 시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 진영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했으나 뜰의 오동나무도 나라의 재산이라며 단호히 거절했고 이순신 장군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파직되었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줄기와 껍질을 사용한다. 생약명은 동피 또는 백동피라 불리며 종기나 타박상, 피부염을 비롯해 여러 가지 증상의 치료에 사용했다.
/조성미 산림조합중앙회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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