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서 오가며 삼시세끼 '옥바라지'
백범, 인천서 부모 '애틋함' 떠올려
1896년 백범 김구가 21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인천항 주변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김구의 얼굴을 보려고 감옥으로 '산(生) 조문'을 왔고, 동료 죄수들은 자기 부모상이라도 당한 듯 애통해 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으로 이사와 매일 같이 세끼 밥을 챙겨주던 곽 여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면회객은 우느라 말도 못하는데 곽 여사는 태연하게 "나는 네가 경기 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백범 김구는 해방 이후인 1946년 38선 이남 순회 첫 일정으로 찾은 인천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눈물'을 떠올렸다.
그는 곽 여사가 식모살이를 했던 물상객주 집에서 인천감리서로 이어진 길을 보면서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다"고 했다.
곽 여사가 밥이 담긴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짚신 발로 하루에 꼬박 3번씩 오갔던 그 길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흔들릴까봐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나 김구는 백범일지에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천에서는 백범 김구가 남긴 흔적을 찾는 작업이 한창이다.
백범이 해방 직후 인천에 왔을 때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흘린 '눈물의 흔적'을 찾았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고 다시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류창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은 "지금 인천대공원 백범의 동상을 인천항 주변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오히려 이전해야 할 것은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라며 "이 동상을 옥바라지 골목으로 옮겨 놓는다면 이야깃거리도 되고 의미도 더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백범, 인천서 부모 '애틋함' 떠올려
인천항 주변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김구의 얼굴을 보려고 감옥으로 '산(生) 조문'을 왔고, 동료 죄수들은 자기 부모상이라도 당한 듯 애통해 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으로 이사와 매일 같이 세끼 밥을 챙겨주던 곽 여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면회객은 우느라 말도 못하는데 곽 여사는 태연하게 "나는 네가 경기 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백범 김구는 해방 이후인 1946년 38선 이남 순회 첫 일정으로 찾은 인천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눈물'을 떠올렸다.
그는 곽 여사가 식모살이를 했던 물상객주 집에서 인천감리서로 이어진 길을 보면서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다"고 했다.
곽 여사가 밥이 담긴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짚신 발로 하루에 꼬박 3번씩 오갔던 그 길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흔들릴까봐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나 김구는 백범일지에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천에서는 백범 김구가 남긴 흔적을 찾는 작업이 한창이다.
백범이 해방 직후 인천에 왔을 때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흘린 '눈물의 흔적'을 찾았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고 다시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류창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은 "지금 인천대공원 백범의 동상을 인천항 주변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오히려 이전해야 할 것은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라며 "이 동상을 옥바라지 골목으로 옮겨 놓는다면 이야깃거리도 되고 의미도 더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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