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115]에스케이- 4 내수에서 수출 중심으로

형(최종건)은 판 벌리고 동생(최종현)은 가꾸고 '환상궁합'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9-07-09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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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건의 동생인 최종현은 1962년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하면서 무역 업무를 전담했다. 사진은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당시 선경합섬 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 /SK 제공

'닭표 안감' 홍콩 최초 수출
1962년 선경산업(주) 설립
레이온능직 42만달러 계약
'사업몰두'에 박대통령 방문
1967년 183만달러 수출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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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의 본격적인 도약은 1960년대 군사정부 출현과 함께 개시된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편승하면서부터였다.

군사정부는 1962년 7월 14일부로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제정 공포했다. 국내 산업을 외래 사치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일환으로 외국산 면직물과 나일론 직물에 대한 국내 판매를 금지했다.

이로 인해 위기국면에 있던 국내 섬유업계 형편이 점차 호전돼 갔다. 아울러 정부는 1961년 8월에 무역법을 제정해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실시했다.

선경은 1962년 4월에 '닭표' 안감 10만마(1만1천300달러 상당)를 홍콩에 처녀 수출했다.

이후 선경은 해외수출에 주력하기 위해 8월 1일에 자본금 1천만원의 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최종건의 아우 최종현이 경영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최종현은 수원농고와 서울대 농대를 거쳐 미국에 유학해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석사를 받고 귀국, 1962년 11월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했다.

>> 형제 공동경영


형인 최종건은 일을 저지르고 벌리는 반면 동생 종현은 일을 꾸미고 가꾸는 스타일이어서 환상의 궁합이었다. 이후부터 선경은 형제가 공동으로 경영했는데 최종현은 무역업무를 전담했다.

정부는 국제수지 개선을 목적으로 1963년 1월 5일부터 제품의 수출을 전제로 원료수입을 허가하는 내용의 수출입 링크제를 시행했다. 수출촉진을 통해 균형무역을 달성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해 3월 최종현이 홍콩에 출장을 가서 레이온능직 300만마(42만6천달러) 수출 건을 성사시켰다.

선경이 처녀 수출한 레이온 능직에 대한 홍콩 바이어들의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홍콩 바이어들이 일본 메이커들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수입선 다변화를 고려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다.

수출대금 42만6천달러 중 인견사 1천500고리를 확보하기 위해 15만달러를 확보하고 나머지 27만6천달러로 나일론원사의 구상무역허가를 신청했다. 구상무역이란 일명 바터무역으로 국제간의 물물교환 무역을 의미한다.

당시 나일론직물은 인기 절정이었으나 원사수입용 달러화 배정액수가 대폭 감소돼 1963년의 국내 나일론직물의 생산실적은 전년도 350만마의 절반 정도에 불과해 나일론 생산업체 간에 나일론원사 수입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

최종현은 수완을 발휘해서 원사수입 9만달러를 확보함으로써 선경은 일거에 8천여만원을 벌어들였다. 쌀값으로 환산한 현재 가치로 약 40억원에 해당한다.

이 무렵 선경의 최종건 사장은 박정희 정부와 인연을 맺는데 계기는 다음과 같다.

"최종건이 기업 성장에만 몰두한 것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의 선경직물 수원공장 방문으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민정 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다시 찾았다.

>> 박정희 정부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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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선경직물과 최종건 회장에 대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홍보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예컨대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히트 상품이 됐다.(최종건) 박정희 만남이 있기까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일회담 막후 교섭차 김종필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환송회를 겸한 만찬장에서 박정희 의장은 이렇게 한탄했다.

"기업인들이 거의 다 부정축재자들이니 대체 우리나라 경제를 누가 이끌어가겠습니까?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을 꼽자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특혜 없이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입니다."

이때 김종필이 나섰다. "수원에 선경직물이라고 있는데,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라고 합니다."

김종필은 직계 부하인 이병희에게서 들은 대로 선경직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업을 일으킨 최종건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설명했다.'('시사저널', 2015.03.19, [新 한국의 가벌] #19)

이병희(1926~1997)는 용인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8기)를 나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5·16 직후 육사 동기생인 김종필이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 됐다. 서울분실장으로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후 1980년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 중 일부를 강제로 헌납당하고 정치규제를 당한 수원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선경은 수출에 올인, 1967년 제3회 수출의 날에는 183만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식산포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 사업은 순풍의 돛을 단 듯 빠르게 확대된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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