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칼럼]'없는 것'과 '가진 것'

윤상철

발행일 2019-08-06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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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보상 욕구 부르는 빈곤·결핍
집단 확산땐 조급증·의구심 낳기도
결과의 평등, 사회 발전잠재력 침식
강한 열망 오늘의 한국 만든 원동력
역사의 변증법 개인·국가 성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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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주말드라마를 보다가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결핍감이 이후의 삶을 얼마나 왜곡할 수 있는지를 새삼 돌이켜 보게 되었다. '어머니를 존경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는 남자의 내면에 깔려 있는 결핍이 자신의 딸을 평생 짓누르게 될 걸 걱정하는 다른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갑작스러운 부자들이 자신의 자식을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사람과 맺어주려는 정략적 결혼이 낳은 파국들은 TV드라마들의 흔한 소재이기도 하다. 빈곤과 결핍이 낳는 '상대적 박탈'이나 '지위불일치'가 가져오는 좌절과 보상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보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에 과하게 집착하고, 스스로 '가진 것'을 가볍게 여기기 쉽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인 차원의 보상 욕구가 사회 수준의 문제로 확산되면 좀 더 복잡해진다. 제도, 법, 그리고 정책을 통한 사회적 조정의 과정에서 또 다른 불일치를 낳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국민들은 군사쿠데타와 돌진적 산업화를 용인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되었고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그리고 사회안전망 없는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다.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적 발전전략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낳았기에 이를 낙수효과가 부재한 이윤주도성장으로 인식하고 노동자를 중시하는 소득주도성장으로 나아갔지만 급속한 최저임금인상과 52시간 근무제, 그리고 과도한 복지확장은 경제성장을 지연시킨다. 과도하게 이상적이고 지연된 적폐청산은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제시하고 있지만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권력을 활용하여 급하게 진행되다 보니 또 다른 유사 적폐를 낳고 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더 커 보이고 우리가 이룬 것은 누구나 어느 나라나 다 쉽게 이룰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회의 진화발전과정이라는 생각이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을 동시에 성취해낸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 진로를 너무 조급하고 더 소용돌이치게 만들고 있다.

오랜 남북갈등은 평화를 희구하게 했고 민족분단은 민족적 완성체를 당장의 대안으로 생각하게 한다. 전쟁과 충돌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고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사회적으로 균열과 갈등을 체험하면서 평화적 결과보다 평화적 과정을 우선시하는 조급증은 국가의 영토가 유린되고 국민들이 기본적인 안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민족분단은 늘 국제지정학에 의해 국가와 민족의 행로가 좌우되는 불편한 경험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대안이 폐쇄적 쇼비니즘적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워 우리 사회를 어떠한 가치와 이념 속에서 세울 것인지에 대한 대안 없이 수십 년간 같이 해온 정치군사적 경제적 동맹들을 다 뿌리치는 편협한 홀로서기로 갈 일은 아니다.

사려깊게 구상되지 못한 평등은 타인의 자유도 사회의 발전도 침해하기 마련이다. 결과의 평등에 사로잡히다 보면 구사회주의의 길이 아니더라도 국가주의의 함정에 침몰할 수 있다. 개인들은 자유와 삶의 동기를 잃음으로써 이 사회의 발전잠재력은 침식되게 된다. 아직까지도 역사적 시대와 사회적 집단의 우열은 사회적 생산력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생산력의 발전 위에서 분배와 평등, 그리고 개개인의 자유와 성취가 확산된다. 사회집단 간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도 또 다른 불평등의 도래에 유의해야 한다. 모든 사회는 역사적으로 계승되지만 항상 새로운 개인들에 의해 재구성된다. 과거의 불평등에 대한 연좌제적 복수가 불가할 정도로 사회의 구성원은 계속 바뀌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게 된다.

최근 인류의 발전은 정당성 있는 주체가 씨족, 부족, 가족, 국가가 아닌 집단에서 개인으로 진화해왔다. 그러나 사회의 지속은 개인만으로 이뤄질 수 없고 사람들의 삶을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촘촘히 메우고 연결하는 다양한 사회단위를 필요로 한다. 너무 과도한 개인주의와 국가와 사회의 무능력은 장기적으로 그 사회를 해체하게 될 수 있다. 다른 희망이었던 민족은 더더욱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온 모든 가치들은 다 특정한 역사와 발전시기에 필요한 덕목이었고 당시 사회를 추동하는 힘이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은 이전에 추구했던 가치가 현재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가를 말할 뿐 결코 이를 폐기하거나 대체하지는 않는다. 500년된 예멘의 아파트를 고집하지는 않더라도 30년이 되기도 전에 재개발을 시도하는 우리들이 "시체에서 악취가 나지 않게 하려는 것보다 어렵고 비싸지만 쓸데없는 일은 없다"라는 말이나 어설픈 진보로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성찰해볼 일이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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