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25)]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과 신낙균

올림픽 금메달 지켜낸 언론… 치욕의 상징 일장기를 지우다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9-08-29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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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우승 특집기사 게재… 이길용·신낙균 주도 편집국 전체 동참
인천서 자란 이길용 배재학당 졸업후 일본서 반일 격문 옮기다 서대문형무소 '수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송진우 만나 체육기자 입문… 6·25때 납북돼 행적 묘연
인천상고 출신 신낙균 3·1운동 계기 사진 인연… 국내 사진전문가 최초 현충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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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 2면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 오른 사진이 실렸다.

다들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기정 선수 유니폼 가슴 부근 국적을 알리는 국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렴풋한 회색빛 먹 자국만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가 고의로 일장기를 지운 것으로 보고 신문 발행에 가담한 주요 인물들을 체포했다.

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길용(1899~?)과 신낙균(1899~1955)이 있다.

이길용은 1899년 경상남도 마산(현 경남 창원시)에서 태어났다.

한국체육기자연맹이 1993년 발간한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마산 지역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자식 교육을 위해 인천 동구 창영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이길용은 서울에 있는 배재학당(현 배재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이길용은 경인선을 타고 서울로 통학하면서 이후 인천 지역 주요 인사로 성장한 이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이후 인천을 연고로 한 배재학당 출신들의 모임인 '인배회'와

문화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물포 청년회'에서 활동하는 데 초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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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가 지워진 채 발행된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2면(사진 왼쪽)과 원본 사진.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후 일본에 잠시 유학한 이길용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철도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인쇄된 반일(反日) 격문을 열차를 통해 옮기다 일본 경찰에 적발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길용은 그의 일생에서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송진우(1887~1945)와 만났다. 이길용은 출옥 후인 1921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의 권유를 받아 신문사에 입사해 체육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체육기자의 길로 들어선 1920년대는 3·1 만세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이 펼쳐지던 시기다. 당시 지식인들은 스포츠가 민족을 단결하고, 세계에 우리나라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여러 스포츠를 접한 이길용에게 체육은 또 다른 형태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는 1927년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하고, 1930년부터 새 체육용어 보급 사업에도 힘쓰기 시작했다.

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 당시 동아일보에는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사장인 송진우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인물이고, 사회부장이었던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은 시인 이육사와 함께 글로써 일제에 저항한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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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이길용·신낙균

인천의 독립운동가인 신낙균도 사진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신낙균은 우리나라 1세대 포토저널리스트다. 그가 사진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3·1 운동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1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머물던 신낙균은 친구들과 함께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그는 몰래 안성을 빠져나와 서울 매부의 집으로 피신해 8개월 동안 숨어 살았다. 

 

이곳에서 신낙균은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매부 정욱진에게 사진을 처음 접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신낙균은 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일본의 유일한 사진전문 교육기관인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신낙균은 평소 후배 사진가 교육 과정에서 "사진은 단순히 기념이나 오락이 아니다. 사진의 앵글에 따라 국가의 안위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을 즐겨 사용했을 정도로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

1930년대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찰 대상이었다. 사장 송진우의 주도로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인 문맹 퇴치 운동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했고,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하며 종교의 자유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베를린올림픽 마지막 날인 1936년 8월 10일. 이날 열린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들어왔고, 동아일보는 보름이 지난 8월 25일 자 2면에 손기정 우승 특집 기사를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고의로 지웠다.

당시 언론이 일본 대표로 참여한 조선인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길용도 자필 수기를 통해 "일제강점기 때 신문의 일장기 사진 말소는 항다반(恒茶飯·차를 마시는 일처럼 흔한 일)으로 부지기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길용은 이보다 4년 전인 1932년 LA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마라톤에 참가한 김은배(6위)와 권태하(9위)의 사진 속 일장기를 지운 바 있다. 당시에는 다행히 조선총독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손기정이 우승한 3일 뒤인 8월 13일 자에는 '조선중앙일보' 4면과 동아일보 지방판 2면에 일장기가 없는 사진이 실렸다.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간한 '조선출판경찰개요'에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은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인쇄 오류로 일장기가 지워진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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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보고한 일장기 말소사건 조직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하지만 8월 25일 자 신문은 조선총독부 감시망에 걸렸다. 

 

사진 속 손기정의 얼굴 등이 너무 선명하게 나와 고의로 일장기만 지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한체육기자연맹이 발간한 '일장기 말소 사건 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일장기 말소 사실은 일본군 사령부가 신문 발행일인 24일 오후 4시 신문 배송 중지를 명령했으나, 이미 발송이 끝난 상태였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기도 경찰부장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길용은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24일 자 석간에 실으려 하는 흉부의 일장기를 흐릿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상범은 이를 승낙하고 원화에 착색한 뒤, 사진부 과장 신낙균의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런 후에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 반경 사진부실에 와서 사진부 과장 신낙균과 사진부원 서형호에게 '이상범이 지우기는 했으나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 동판에 현출된 사진 중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해 말소한 뒤 인쇄 부로 넘겨 다음 날 석간에 게재한 것이다."

일장기 말소 과정에 동아일보 편집국 전체가 참여한 셈이다. 

 

게다가 이길용이 처음 일장기가 있는 사진 수정을 부탁했던 사람은 월북화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삽화가였던 정현웅(1911~1976)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족들의 증언으로는 이날 오전 신문에 들어갈 손기정 사진 수정 작업을 시작한 정현웅은 점심을 먹고 일장기를 지우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옆자리에 있던 이상범이 대신 일장기를 지웠다. 

 

이 이야기는 정현웅 평전인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에 잘 나와 있다.

이길용 본인도 1948년 발간한 '신문기자 수첩'이라는 책에서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밝혔다.

일장기를 지운 대가는 혹독했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정간 처분이 내려져 발행이 중단됐고, 8명의 기자가 경기도 감찰부에 체포됐다.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길용과 신낙균 등 5명은 40일에 걸쳐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한 뒤에야 석방됐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길용은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반일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광복 전까지 4차례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낙균도 이 사건으로 언론계뿐만 아니라 사진계에서도 추방당했다.

해방 이후 이길용은 우리나라 체육 역사를 정리한 백서 발간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납북돼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낙균은 수원북중학교에서 물리교사로 일하다가 1955년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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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손기정 기념관에 설치된 이길용 흉상.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2017년 8월 25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손기정기념관에 이길용 흉상이 손기정 선수의 동상과 나란히 놓였다.

 

이날은 1936년 이길용이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린 날이다. 같은 해 4월에는 신낙균의 묘소가 국내 사진 전문가 중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길용과 신낙균은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의 사진과 함께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이는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길용의 셋째 아들인 이태영(78) 대한체육회 고문은 지난 23일 경인일보와의 통화에서 "납북 당시에는 내가 10살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성격이 대쪽같고 강인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며 "이런 성격이 일장기 말소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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