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면의 '고서산책']전설의 한국SF만화 '라이파이'

조성면

발행일 2019-09-02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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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문학으로 간주하던 시대
어린이만 '열광' 어른들은 '금지'
사회를 바꾸고 세상 변화시키는
엉뚱한 막내들의 상상력 도전
50~60년대 하위문화의 유쾌한 반란


전문가 조성면2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
세상을 바꾸는 것은 모범생이 아니라 비범한 말썽쟁이나 막내들이다. 장남 · 장녀는 강한 책임감으로 보수파 모범생이 많이 나오고, 장남과 막내 사이에 낀 둘째는 살아남기 위해 존재감을 과시하는 일을 많이 벌이거나 사교술에 능란하며, 막내 가운데서 반항아와 혁명가들이 많이 나온다는 믿거나 말거나 통계가 있다. 집안에서는 막내라고 귀여움을 독차지하다가 사회에 나와서는 집안에서 받던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여 자연 불평불만이 많아진 막내가 결국 기존의 판을 뒤집는 혁명가가 된다는 것이다.

유교와 숭문주의 전통이 강한 한국문화에서 SF는 담론의 관심 밖에 있었던 '둘째'였고, 만화는 논의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문화적 '막내'였다. 그러니 SF만화는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담론의 주변을 떠돌던 SF만화가 지금 고서시장에서는 한적(韓籍)들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김산호 화백의 SF만화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1959~1962)는 아직 완질본을 확인하지 못한 극희귀본이다. '라이파이'는 몇 살 터울의 선배들에게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그러나 웬일인지 그 옛날에도 실물은 없고 전설로만 떠돌던 만화였다.

십수 년 전 서울대역 근방의 헌책방에서 마침내 그 전설과 조우했다. 2003년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영인한 양장본 초판 '라이파이'였다. 언제 나왔는지도 모르게 나왔다 금세 절판되어 귀중본이 된 책인지라 주인장이 15만원을 불렀다. 당시 대학 시간강사 신분이었던 터라 당연히 입수해야 하는 자료임에도 한참 동안 실존적 고민(?)을 거듭하다 무리해서 가까스로 구입했다. 그 '라이파이'를 강의 자료로 잠깐 사용하고 잊고 있었다가 우연히 김산호 선생을 자택 만몽재(卍夢齋)를 방문하여 '인인화락'(수원문화재단刊, 2014년 겨울호) 인터뷰를 진행하며 이 영인 양장본에 라이파이 캐릭터 그림과 함께 저자 친필 사인까지 받았다. 고서를 접하다 보니 가끔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행운과 영광을 누리는 경우도 생긴다.

지금이야 '라이파이'가 한국SF만화의 전설로 대접받고 있지만, SF는 한국문화사에서 푸대접은 고사하고 아예 무대접이었다. 약관의 청년 김산호가 SF만화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았을 때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서출판 남훈사의 부엉이 시리즈로 '라이파이'가 출간되자마자 대박을 쳤다. 종래에는 출판사 직원이 갈비 반 짝을 사들고 집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라이파이' 신간이 나오는 날에는 만화가게 앞에 수십 수백 명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당시 공무원 사무관 월급이 4천~5천원일 때 '라이파이' 한 편당 무려 50만원 넘게 벌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김산호는 전격적으로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심한 고초를 겪는다. 혐의점은 1958년 데뷔작 '황혼에 빛난 별'의 별이 김일성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또 '라이파이'에 어째서 인공기와 같은 별이 들어간 이유가 무엇인가 등의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 김산호는 창작의 자유를 찾아 훌쩍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도 김산호의 활약은 대단했다. 마블, DC와 함께 빅3 코믹스였던 찰튼 코믹스와 손잡고 '샤이안 키드(Cheynne Kid)' 등 600여권의 단행본을 발표했다.

한국SF만화의 효시가 어떤 작품인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현재까지는 1952년 일신사에 나온 최상권의 3권짜리 딱지본 만화 '헨델박사'가 가장 앞선다. SF만화는 SF를 B급 문학으로 간주하던 시대에 나온 만화라서 어린이 독자만 열광하고 어른들은 금지하는 정크요, 하위문화(subculture)였다.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엉뚱한 막내들의 기발한 상상력과 금기를 깨는 도전이었다. '라이파이'는 5~60년대 문화판의 질서를 뒤집은 막내요, 하위문화가 벌인 유쾌한 반란이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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