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단정하고 강한 항심(恒心)의 산문

유성호

발행일 2019-09-18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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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표현·진솔한 고백 '산문'
비평집엔 시큰둥하던 친구도 반색
충격적 정보 '스캔들화' 하는 요즘
과잉문장으로 사람들 내면에 상처
산문 통해 한시적 소음 벗어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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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처음으로 산문집을 한 권 냈다. 그동안 펴냈던 비평서들이 워낙 전문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지인들에게 읽어보라고 대뜸 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과감하게 '자연인 아무개'가 간직하고 있는 섭렵과 경험의 기억들을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줄 수 있었다. 그렇게 글에는 전문성과 보편성 혹은 낯섦과 친숙함이 상대적으로 담기게 마련인데, 흔히 '산문'의 범주로 묶이는 것들은 대체로 부드러운 표현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산문'의 반대는 '비평'이 아니라 '운문'이 아니었던가.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리듬에 언어를 대응시켜 낭독과 음송에 어울리는 형식을 입힌 글을 운문이라고 한다면, 산문은 그러한 외적 리듬보다는 내용상의 명료함과 서사성을 강화하다 보니 생겨난 줄글 형식을 말한다. 장르로 말하면 소설, 수필, 비평 등이 모두 산문이다. 사전에서는 "운문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리듬이나 정형성에 제약받지 않는 자유로운 문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산문에 무한정한 자유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장르적 관습(convention)과 함께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 장르를 통해 경험하고 또 기대해왔던 어떤 기율이나 원리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산문을 가장 잘 쓴 작가들은 누구일까. 내 기준으로 본다면 가장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개성을 담은 산문을 쓴 분은, 일제강점기만 예로 든다면, 정지용과 이태준과 이효석과 김기림과 이상(李箱)이다. 이분들은 본인들의 주력 장르였던 시나 소설이나 비평만큼 아름다운 산문을 우리 문학사에 남겨주었다. 아쉽게도 김소월, 백석, 윤동주는 그분들이 남겨준 탁월한 시적 성과에 비해 산문적 충격은 약한 편이다. 반대로 산문에서 일가를 이룬 변영로, 양주동, 김진섭, 이양하, 피천득 등의 수필가들도 어김없이 떠오른다. 그 점에서 근대문학사는 산문의 일대 부흥을 이룬 시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C. Baudelaire)는 산문을 일러 "영혼의 서정적 격정에도, 몽상의 파동에도, 의식의 충격에도 능히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면서도 강한" 글이어야 하고, "이러한 이상(理想)은 무엇보다도 도시와 서로 무수하게 얽힌 복잡한 관계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운문인 서정시가 격정과 몽상과 충격을 순간적으로 주는 근대 이전 사회의 잔광(殘光)이라면, 산문은 막 떠오르는 근대 도시의 문학이요 서정시를 유연하고도 강하게 감싸고 있는 서광(曙光)임을 말함으로써, 자본주의가 형성시켜가는 '산문적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그만큼 산문은 근대의 본격적 산물인 셈이다.

어쨌든 '산문'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을 욕망하면서, 특정 토픽에 대해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타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줌으로써 그들의 삶과 생각에 충격과 변형을 주려는 계몽 의지가 그 안에 흐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러나 여기에서의 계몽이 위압적 훈계나 자기 확신의 강요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공감에의 간곡한 요청이요 오랜 경험과 기억을 나누자는 호소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이 글쓴이의 인격이나 사람됨을 담고 있다면, 그 대표 사례는 아마도 산문일 것이다. 그동안 진력해온 비평과 달리 산문이 이러한 소통과 공감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산문집을 건네니까, 비평집에는 시큰둥하던 친구들도 더러 반색을 해준다. 네 글이 재밌다면서 말이다. 나로서도 재미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충격적인 정보를 스캔들화(化)하는 데 앞장서는 과잉 문장들에 사람들의 내면적 상처가 오히려 깊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을 고르고 다듬고 세련화해야 할 주체들이 그러한 언어 과잉을 통해 존재론적 잔명(殘命)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 한편으로는 친숙하고 평화로운 위안을 주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의 충전을 꾀하는 산문을 통해 그러한 한시적 소음에서 벗어나 단정하고 강한 항심(恒心)을 가다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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