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꽃]들꽃

권성훈

발행일 2019-09-17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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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가진 것이

이름 없는 것이 되어

이름 없어야 할 것이

이름을 가진 것이 되어

길가에 나와 앉았다.



꼭 살아야 할 까닭도

목숨에 딸린 애련 같은 거 하나 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물들이다가

바람에 살을 부비다가

외롭다가

잠시 이승에 댕겼다가 꺼진

반딧불처럼

고개를 떨군다.

뉘엿뉘엿 지는 세월 속으로만.

이근배(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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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이름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이름에 묶여있지 않다는 말이다. 사물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름은 한번 붙어진 이상 그 이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법. 야생에 핀 들꽃은 온실에서 자라는 꽃들이 가지지 못한 몸짓으로 피어나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는 자유를 가졌다. 보통명사 들꽃은 고유한 이름이 없기에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이름을 가진 것이/'이름 없는 것이 되어/이름 없어야 할 것이/이름을 가진 것이 되어 길가에 나와'있지 않던가. 거기서 이름 없는 것들이 이름 있는 것들을 보면서 '꼭 살아야 할 까닭도 목숨에 딸린 애련 같은 거 하나 없이'도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이른바 이름 있는 당신을 향해 '하늘을 바라보다가/물들이다가/바람에 살을 부비다가/외롭다가' 그렇게 반짝 생을 마감하는 '반딧불처럼' 들꽃은 없는 이름으로, 있는 이름을 소리 없이 가르쳐 주며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 마다 자신을 흔들며 '뉘엿뉘엿 지는 세월 속으로만' 걸어가고 있지 않던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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