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정한용

발행일 2019-10-04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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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이나 외국인이나
모두 불친절·친절한건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여유·배려 베푼다면
삶이 더 편안해져… 그러기 위해선
'나부터 먼저' 타인에 너그러워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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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시인
지금 이 글을 아이슬란드에서 쓰고 있다. 창밖엔 비가 퍼붓는다. 여행자에게 날씨는 여행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이번 주 내내 비가 온다니 짜증이 난다. 짜증과 화를 낸다고 비가 멈출 것도 아닌데, 그냥 나 자신을 향한 상처일 뿐인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을 땐 즐기라 했는데, 그냥 넘기기가 쉽지 않다. 대상이 없는 짜증과 화는 우리 삶을 갉아먹는 좀벌레 같은 것,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자주 화를 내는 건 아닌지.

좀 지난 일이지만 우리 집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 욕실을 새로 리모델링하고 두 달이 안 돼 샤워기 머리가 부러졌다. 수리를 신청했더니 기사가 왔다. 이거 조심해 써야 해요. 플라스틱이니까 막 떨어뜨리고 두드리면 부서지잖아요. 짜증이 나지만 꾹 참는다는 말투다. 나 역시 약간 화가 났지만, 일부러 힘을 준 적도 없는데 이렇게 두 달 만에 부러지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녜요. 그 기사가 한 걸음 더 나간다. 이번엔 무료로 해주지만 다음에 또 부르면 유상처리할 거예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샌들 뒤 끈 고무밴드가 늘어나 수선을 신청했다. 열흘 만에 다 고쳤으니 찾아가라는 문자가 왔다. 그런데 고친 게 좀 이상했다. 밴드를 새것으로 교체한 게 아니라, 늘어난 걸 절반으로 잘라붙여 놓았다. 나는 좀 어이없어서, 양쪽이 안 맞네요, 여긴 늘어나질 않아요. 점원 얼굴색이 바뀌며, 짧게 잘라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줬잖아요. 짜증이 나지만 참는다는 말투다. 나는 주눅이 들어, 그래도 탄력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죠. 점원이 신경질적으로, 그럼 다시 보낼 테니 길이가 줄어들어도 몰라요.

두 경우 모두 꽤 이름난 기업 제품이었는데,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와는 아주 대조적인 두 사례를 들려드리고 싶다. 지금 아이슬란드로 오기 전에 나는 노르웨이와 페로제도를 보름간 여행했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사람들이 매우 느긋하고 여유가 있다고 느끼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특히 북구의 사람들이 겉으로는 무표정하고 무뚝뚝해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사실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경험한 예이다.

페로 토르샤븐의 한 민박집에서 나흘을 묵었다. 내 숙소는 일층이고 주인은 이층에 살았는데, 집이 청결하고 시설이 잘 갖추어져 고급 호텔보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중 내 카메라 삼각대의 나사가 느슨해져 사용이 매우 불편하게 되었다. 삼각대 나사는 육각형 드라이버로만 죌 수가 있는 특이한 구조라서 주변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주인에게 도움의 메일을 보냈다. 그는 주말 동안 가족 여행을 떠나 지금 집에 없다고, 하지만 기다려보라는 답을 보내왔다. 잠시 후 이웃집 낯선 아저씨가 내 문을 두드리더니, 뭐 도움이 필요한 게 없느냐, 묻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감동했다. 그 친절한 사람들 덕에 나는 삼각대도 고치고, 여분의 육각형 드라이버까지 하나 얻어 여행 내내 잘 사용하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한 마트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이다. 저녁나절 손님이 꽤 붐비고 있었고, 온통 아이슬란드 언어로 쓰여 있는 매장에서 나는 달걀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실패했다. 그때 물건을 가득 싣고 와 선반에 바삐 정리하던 직원을 발견하고, 달걀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젊은 직원은 일과를 마칠 때라 조금 지쳐 보였다. 나도 조금 미안해졌다. 그런데 그녀는 불러줘 고맙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던 일을 멈추고 꽤 큰 매장을 이리저리 돌아 나를 안내했다. 그 순간 나는 많이 미안해졌고, 그만큼 많이 행복해졌다. 다시 보니 그녀가 아주 많이 예쁜 것 같았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불친절하다는 말은 아니다. 더욱이 모든 외국인이 우리보다 친절하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유와 배려를 통해 우리 사는 곳이 더 넓어지고 편안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런 세상을 향한 사회 시스템도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우선 '나부터 먼저' 타자에게 너그러워져야 하지 않을까. 짜증은 짜증으로 돌아오고, 화는 화로 돌아올 뿐이다.

/정한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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