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29)]잊히고 묻힌 의사 출신 이민창

'사람을 구하는 의사'이기 전에 '나라를 고치는 의사'였다

정진오 기자

발행일 2019-10-03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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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1929년 인천 정착해 병원 운영하다 1941년 '합병 30년후 독립 약속 지켜라' 투쟁
엘리트 인생 버리고 감옥서도 항거 해방전 출소 거부 1년6월 형기 받고 4년 살아
이후 모습 드러내지 않고 '두문불출' 가난한 자들에 인술 펼치고 과학공부 매진


'開國(개국) 495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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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인천에서 병원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이민창(李敏昌)은 신상 카드 나이를 기록하는 곳에 이렇게 적었다.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지 30년이나 더 흐른 때임에도 이민창은 여전히 자신의 생일을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따졌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변절하던 시기에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

그 이민창의 드라마 같은 항일운동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자료는 1955년 고일 선생이 펴낸 '인천석금'이 유일하다시피 하다.

'인술(仁術)에 여생 바치는 노투사 '이민창' 씨'란 제목의 글은

"1941년 일제의 황혼시절이다. 융희(隆熙) 4년 경술한일합병(庚戌韓日合倂)의 국치(國恥)의 시간이 30주년이 지난 그해에 서슬이 시퍼런 독오른 일제 면전에서 단독육탄으로 항쟁하던 투사가 깊은 밤중에 총소리 같은 뉴~스를 던졌으니" 이렇게 시작한다.

 

'인천석금'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1941년, 이민창은 '너희들이 합병 후 30년이 지나면 독립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뿌렸다. 

 

조선 총독과 일본 내각 대신들에게도 서한을 발송했다. 이민창은 의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의사 역시 누구나 부러워하는 존재였다. 

 

그는 활짝 열려 있는 탄탄대로의 인생을 버리고 일제에 항거하고 나섰다. 그는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주독립의 필연성을 국제정세에 맞추어 연설했다. 

 

청중들은 다들 "미쳤다" "큰일 나겠다"고 말하며 꽁무니를 뺐다. 이민창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 권오연이 담당했다. 그는 이민창을 고문했다. 그래도 이민창은 굽히지 않고 목청을 돋워 취조하는 형사를 나무랐다. 

 

"아무리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네놈이지만 한국인의 피를 받았다면 내 주장이 그래 그르냐? 옳으냐?" 그렇게 꾸짖음을 받았던 권오연은 해방 후 '노죄수의 굳고 곧고 깨끗하고 거룩했던 그 기개 용기 명석 준엄에는 고개가 수그러졌다'고 고백했다.

이민창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가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독립문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문의 유래를 연설했다. 지나던 행인들은 목례로 답했다.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도 항거했다. 옥중에서 조회 때마다 불러야 했던 기미가요를 거부했고, 황국신민선서도 일축했다. 

 

이 일로 형기가 더 늘어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5년 새해 만기 출소일이 되었다. 찾아온 부인에게 이민창은 말했다. 

 

나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가지 않고 감옥에서 죽을 테니, 어서 돌아가오.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경들이 가족들을 못살게 굴 게 분명하니 오히려 감옥에 있는 것이 가족들에게도 좋을 것이오. 그렇게 만기를 더 넘겼고, 해방이 되어서야 출옥했다.

이민창은 일본인과 섞이기를 싫어했다. 투옥되기 전의 일이다. 큰딸이 영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일본인이 새로 설립한 송현심상소학교로 옮겼다. 

 

그 얘기를 나중에 들은 이민창은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말했다. 

 

"내 딸은 당신 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내가 도로 데리고 가겠소." 사립학교일지라도 일본인이 교장인 곳에서는 딸을 근무하게 할 수 없다는 거였다. 큰딸은 다시 영신학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연중기획용 카피촬영
1955년 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 표지(1979년 재판)와 '인천석금'속에 실린 이민창 이야기. /'인천석금' 촬영

이민창은 '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치고, 그 다음이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약관의 나이에 한성병원부속학교에 입학하여 강제병합 이전에 졸업, 서울에서 개업했다. 

 

이화학당 출신을 부인으로 맞아 잘 살았으나 1916년쯤에 일제의 학정에 분개한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하지만 고국을 잊지 못해 몇 년 뒤 다시 양강도 경흥과 황해도 재령에서 공의(公醫) 생활을 했다. 인천에는 1929년쯤에 정착했다. 

 

이중설병원 자리에서 먼저 병원도 운영했다. 그렇게 인천에서 10년 정도 병원을 하다가 '약속한 30년이 지났으니 나라를 내놓으라'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제에 맞서 혼자서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이민창은 일제 말기 4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이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독립이 되기 전에는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도 바라던 해방이 되었건만 이민창은 초가집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했다. 웬 혁명가가 그리 많고, 애국자가 쏟아지고 정치인이 범람하는 거냐는 이유였다. 

 

정당인도, 지도자의 타이틀도 마다했다. 그저 집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술(仁術)을 펼치고, 과학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인천 시내의 어떤 의사는 피란민 환자가 숨을 거두었는데 약값을 내지 않았다면서 사망진단서를 발급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이민창은 앞장서서 사망진단서를 끊어주었다. 그는 또 환자들의 형편에 맞게 치료비와 약값을 받았다.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되면 받고 그렇지 못하면 받지 않고 치료를 해 주었다.

고일 선생이 그려낸 노투사 이민창의 인생 스토리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아니,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겠다 싶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민창과 관련해서 '인천석금'을 넘어서는 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인천석금'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더 궁금해진다.

고일 선생의 기록은 정확하다. 약전 형식으로 정리할 만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하여 그의 인생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던 듯하다. 

 

1941년에 독립만세를 부르고 벽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대문형무소 담벼락을 배경으로 찍은 이민창의 사진은 1941년(소화 16년) 7월 14일로 되어 있다. 

 

또 경성지방법원에서 최초 언도받은 형기도 1년 6월이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위반이었고, 언도일은 1942년 2월 26일이었다. 7개월 넘게 미결수 신분으로 고초를 당했다. 

 

그는 1943년 8월 26일에 만기출소해야 했으나 감옥생활을 더 했다. 일제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규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더 치렀다. 그는 또 1945년, 해가 바뀌면서 청주형무소에서 출옥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감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는데, 해방이 되고 나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요즘 교정 시스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아무리 수감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하더라도 더 있을 수는 없다는 거다.

 

기한을 넘겨서 교도소에 머물게 되면 그 시간만큼 교정 당국에서 수감자를 감금하는 죄를 짓게 된다는 얘기다.

이민창이 인물카드에 쓴 '개국 495년'으로 따지면 그는 1886년에 태어났다. 

 

이 인물카드의 본적지는 '경기도 인천부(仁川府) 화정(花町) 165'로 되어 있다. 당시 화정은 지금의 중구 신흥동 지역이다. 

 

하지만, 이민창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고일 선생은 이민창이 서울 태생이라고 했다. 이민창이 인천에 이주한 뒤 본적지를 바꾼 것인지도 확인해야 할 일이다.

연중기획용 이민창 인물카드
이민창의 인물 카드에 적힌 내용.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인물 카드

이민창은 직업란에는 '의사(醫師)'라고 적었다. 강제병합 이전에 한성병원부속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개업했다고 했으니 1910년쯤부터는 의사생활을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했다가 귀국해 북한 지역에서 공의생활을 했으며, 인천에는 1929년쯤에 정착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인천에서도 의사생활을 했을 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1942년 인천에서 '신외과'를 개원한 신태범 박사는 '인천 한 세기'를 쓰면서 어쩐 일인지 대선배 의사인 이민창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1942년이면 이민창은 이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이기는 하다. 

 

래도 신태범 박사가 책을 낸 1983년까지 인천에서 생활하던 여러 의사들의 이야기는 하면서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민창을 외면하고 있다는 게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민창은 해방이 되고 청주형무소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곧바로, 너나없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떠들어대는 세태에 신물을 느꼈던지 병원을 이중설 씨에게 넘겨주었던 듯하다. 

 

이민창이 병원을 하던 자리에 새로 연 게 이중설병원이다. 이중설병원은 중구 내동 94번지에 있었고, 진료 과목은 내과와 소아과였다. 1946년에 개원했다. 

 

이민창이 이중설에게 병원을 넘겨주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금은 그 병원 자리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그동안 여러 차례 지번이 변경되는 바람에 '내동 94번지'를 한 곳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민창은 병원을 넘기고 동구 화평동 오두막 초가에서 은거하면서 인술을 펼치고 과학 이론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잘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다가 희생된 인물이 쓸쓸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신령의 가호를 빌어마지 않는다."

고일 선생이 이민창 이야기를 끝내면서 쓴 말이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올해 여기저기서 들려온 얘기이기도 하다. 

 

자신을 내던져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비뚤어진 세태에 안타까워 한 고일 선생의 충심이 읽힌다. 

 

그 60여 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들의 후손 역시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올 한 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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