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30)]상인독립군 배인복

독립투쟁 전선 재정적 지원군… 총을 든 이들의 '총알'이 되다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10-10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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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보성전문학교 졸업… 인천서 석유업 '첫발'
일본 유학시절 징집 피해 상하이로 넘어가
당시 한인사회 상업계 대부 김시문과 교류
묘비에 지사들 후원 아끼지 않은 내용 기록
배재고보때 '만세' 가담해 퇴학 당하기도
해방후 청구양행… 우련통운 지금까지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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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중국 상하이.

어떤 이는 총과 포로 무장해 일제에 맞서 싸웠고, 어떤 이는 말과 글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려면 재정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

상하이에 진출한 우리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그들을 후원했다.

그래서 상하이의 상인들은 총대를 메지 않았고 펜대를 들지 않았지만, 독립군이라고 불리기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이들을 '상인독립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상인독립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든 이들의 총알이 됐고, 펜을 든 이들의 잉크가 돼주었다.

이름 없는 상인들의 활약까지 우리 독립운동사에 하나하나 기록됐으면 좋으련만

해외 상인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진 못했다.

상하이 상인독립군 중에는 인천 출신의 무역상도 있었다.

인천항 하역업체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1911~1997)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인천은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하고 있을 뿐 독립운동과 연결지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충남 태안에 있는 배인복의 묘지에는 그가 자식들에 남긴 글이 새겨진 묘비가 있다.

 

인하대학교 최원식 명예교수가 배인복의 1인칭 시점으로 쓴 글이다. 배인복 일대기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는 이 묘비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가 1941년 상하이로 건너가 사업을 할 당시 독립지사들과 교류하면서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자식들 보거라"라는 짧고 담백한 말로 시작하는 이 묘비문과 배인복의 남은 가족에 따르면 1911년 3월 15일 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난 배인복은 1934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상과를 졸업하고 인천 신포동에서 석유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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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복. /배준영씨 제공
사세를 확장하던 배인복은 1930년대 말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석유 공급이 중단되면서 사업을 접었다. 

 

당시 미국이 일본에 중국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석유·철강 등 지하자원의 수출을 전부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사회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학병 징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

상하이에서 사업을 재개한 그는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흑인시'로 유명한 그의 동생 배인철(1920~1947)도 몇 해 뒤 상하이로 뒤따라 왔는데 여기서 '무역업'을 하던 형 배인복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여러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배인철 연구자인 윤영천 인하대 교수가 2007년 계간지 황해문화(55호)에 쓴 글을 보면 "일제 징용령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간 그(배인철)는 거기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백씨(伯氏) 배인복씨 곁에 머물면서 3개월 남짓 상하이 영미조계 내의 쎈죤스(st. Jones) 대학에 다녔다"는 내용이 나온다.

손과지(孫科志) 상하이 복단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쓴 '상해한인사회사(1910~1945)' 등 상하이 한인사회 연구서를 보면 상하이의 한인 숫자는 1930년대 중반까지 1천500여명을 유지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후 크게 증가했다. 

 

배인복이 이주하기 직전인 1940년 10월에는 7천800여명에 달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으로 한국이 일본의 병참기지로 전락하자 실업자들이 생계를 위해 이주하기도 했고, 배인복처럼 징집을 피해 도망쳐 온 이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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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하던 시절 교류했던 상인독립군 김시문의 '김문공사' 1950년대 중반 전경. 처음 지어진 1910년대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상하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여기를 드나들었다. /어느상인독립군이야기 발췌

이 무렵 한인 자영업자는 400명 가량이었다. 자영업자들은 제과·식품·무역·잡화·철공·인쇄 등 다양한 업종을 운영했는데 고수익자로 분류됐다. 가난한 독립운동가들에 도움의 손길이 가능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상하이 한인사회는 1940년 임시정부의 충칭 이전으로 일본색이 짙어져 갔다. 친일적 단체인 상해거류조선인회 회비 납부자가 1939년 643명에서 1940년 1천700명으로 늘어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을 끊지 않은 상인들이 다수 존재했다.

당시 상하이 한인사회 상업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김시문(1892~1978)도 이런 상인독립군 중 하나였다. 그런데 김시문과 관련된 기록에서 바로 '배인복'이라는 이름 석자가 등장한다. 

 

개풍군 출신으로 1916년 상하이로 이주한 김시문은 프랑스 조계 하비로(霞飛路)에서 김문공사(金文公司)라는 잡화점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는데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상인독립군'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인수해 잠시 경영하기도 했고, 그의 가게는 독립운동가와 임정 요인, 상인들의 사랑방과도 같았다.

김시문은 해방 이후 어지러운 국내 정세를 살피느라 귀국하지 않고 1949년 9월 큰아들 김희원만 홀로 귀국시켰다. 김시문은 아들에게 1947년 먼저 귀국한 배인복을 만나라고 했다. 1949년 12월 아들 김희원은 배인복을 찾아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1949년 12월 30일 김희원이 아버지에 쓴 편지에는 "배인복 선생은 비록 뵙지 못했지만 그의 사무실에 메모를 남겼으며…"라는 대목이 있다.

1949년 12월이면 배인복이 귀국해 고향 인천에서 '청구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운영했을 당시다. 그는 중국 상하이와 인천의 육상 운송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시문이 아들을 통해 남긴 메모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김시문은 홀로 귀국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아들을 위해 상하이에서 교류를 했던 사업가들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는데 배인복 역시 이런 경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두터운 친밀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상인독립군의 대부였던 김시문과 교류했던 배인복 스스로도 독립지사의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 독립운동과 관련한 끈끈한 동지애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김시문 연구자이자 '어느 상인독립군 이야기'의 저자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은 "편지 외에 배인복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1940년대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했다면 당연히 김시문의 김문공사를 찾아가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것"이라며 "당시 김시문을 비롯한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몰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어떤 명단이 있는 조직을 갖추거나 기록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광재 실장은 또 "당시에는 독립운동가와 상인이 명확히 구분됐다기 보다는 상인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도 있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돈이 필요해 상업에 종사했던 사람도 있었다"며 "사실 앞에서 총을 들고 뛰어든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던 상인들도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벌인 독립운동가 후원은 그의 국내 행적을 살펴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배인복과 한국 고고미술사학의 개척자인 우현 고유섭의 태극기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그 이야기도 묘비문에 새겨져 있다.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창영초)에 입학한 꼬마 배인복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네살 위의 형 고유섭과 함께 집 담장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만세를 불렀다가 혼이 났다고 한다. 

 

배인복도 1988년 고유섭 특집 기사를 게재한 잡지 '월간공예'와의 인터뷰에서 "우현 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만, 7~8세의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 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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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서울 배재고보를 다니던 시절 1926년 6·10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사실도 있다. 

 

6·10 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였다.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라는 격문이 살포됐고,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 전국적으로는 1천여 명이나 됐다. 

 

1930년 4월 5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 이름을 실었는데 전체 497명 중 배재고보 11명의 명단에 배인복의 이름이 등장한다.

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누구와 어떻게 교류했는지는 한 번도 연구된 적이 없다. 

 

배인복의 여동생인 배경숙(90) 전 인하대 법대 교수가 큰 오빠의 옛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지만, 고령이라 인터뷰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다른 가족들도 상하이 상인독립군 시절의 이야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가 해방 후 세웠던 청구양행은 이후 무역에서 하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58년 우련통운으로 재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기업인 배인복은 1950년대 말 대한해운공사 인천지점 하역권을 유치해 급속히 성장했다. 배인복은 1976년 동생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가 1997년 11월 11일 중구 송학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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