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31)]결사대장 유봉진과 강화 만세운동

막 내린 대한제국 진위대 '군인'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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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진이 만세운동 시위를 계획했던 당시 강화 길직교회. /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길직·잠두교회 신도들 중심 3월 18일 '거사' 이끌어
백마 타고 등장… 군수·경찰서장에도 '만세' 다그쳐
마니산으로 피신했지만 부모 볼모로 잡혀 결국 체포
민족지도자 조봉암 선생 '독립열망' 불 지핀 계기로
출소후 대대적 환영인파 보도 눈길… 교육자로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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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에 유난히 시달렸던 곳이다.

 

고려 시기 몽골 침입에 맞서 항전하던 전시수도였으며 조선 말기 두 차례의 양요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화도 주민들은 일본의 침략에도 분연히 맞서 싸웠다.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낸 구한말 시기부터 의병이 들고 일어섰다. 

 

강화에서 벌어진 3월 18일의 만세 시위는 단일 사건으로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4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19년 3월 18일 강화 읍내 시장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은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강화 길직교회 신도였던 유봉진은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강화로 돌아온 선두교회 출신의 황도문으로부터 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강화 지역의 만세시위를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유봉진은 원래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그의 보호순사를 지원했다가 탈락해 칼을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시 해산군의 대일항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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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진 /인천인물100인 발췌

유봉진은 3월 8일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와 함께 비밀리에 시위 작전을 짰다.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각 마을마다 회합을 가졌고, 바다 건너 주문도까지 건너가 주민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주문도 예수교회당 신도 120명 앞에서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 천국에서 만나자"고 외쳤다.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윗옷를 보이며 동참을 호소했다.

유봉진과 신도들은 18일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할 문서를 작성했다.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강화읍 장터는 지금의 관청리와 신문리 사이에 걸쳐 있었는데 사이로 냇물이 흐르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시위를 주도한 길직교회, 잠두교회 신도들은 오후 2시가 되자 돌다리 부근에 모여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면 보자기나 종이에 그린 태극기와 '조선독립'이라는 글씨를 쓴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고,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도 동참했다. 

 

당시 일제 기록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는 1만 명에 달했다. 일제시대 강화의 인구가 7만여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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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진의 강화 만세운동 행적이 기록된 '소요사태에 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유봉진은 만세 함성이 터지자 백마를 타고 등장해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시위를 이끌었다. 

 

이어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군중들을 모았다. 당시 유봉진에 대한 1·2심 판결문을 보면 유봉진을 선두로 세운 군중들은 시장을 지나 강화군청과 공자묘(孔子廟)로 이동해 만세를 외쳤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쳐라.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 안으로 침입해 파괴하겠다"고 했다.

시위대는 공자묘 시위 때 경찰에 체포된 주민들을 구하러 경찰서 앞까지 몰려갔다. 유봉진은 "동지를 석방하라. 또한 시장에서 칼을 빼 든 순사보를 때려 죽일 것이니 인도하라"고 했다. 

 

유봉진은 경찰서장에게도 만세를 외치라고 했는데 서장이 마지못해 '만세'를 부르니까 "만세만으로는 안 된다. '조선독립만세'라고 부르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사건 두 달 뒤인 1919년 5월 10일 당시 경기도 장관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보낸 '소요사태에 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에는 유봉진을 강화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수모자(首謀者)'로 기록했다.

일제는 강화 만세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속속 검거에 나섰으나 유봉진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마니산으로 도망친 뒤였다. 

 

그는 마니산에 있을 때 조선총독부에 조선을 반환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경찰에 만세를 다시 부르겠다고 했지만, 우편국이 이를 몰수했다. 

 

이완용에 보낸 친일행위에 대한 경고장도 역시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는 수첩에 연락용 암호를 만들어 기재하는 등 대규모 만세 시위 재개를 노렸지만, 경찰이 부모를 볼모로 잡아 놓고 협박하던 상황이라 결국 산에서 내려와 체포됐다.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복심법원(2심)에서 1년 6개월로 감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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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진이 몸 담고 있었던 대한제국 진위대 모습.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3월 18일 강화 만세운동 사건으로 모두 43명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 중 2명은 여자였다. 

 

한 명은 만세운동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문건을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던 김유의였고, 다른 한 명이 바로 유봉진의 부인 조인애(1883~1961)였다. 

 

조인애도 태극기를 운반하고 18일 시장에서 부녀자를 인솔해 시위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유봉진이 마니산에 숨어지내는 사이 강화에는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9일 일제의 대규모 검거 작전에 반발하며 온수리 천도교, 기독교인 수백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20일에는 매일신보 기자인 조구원이 강화경찰서에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참살하거나 방화하겠다"는 문서를 발송했다. 

 

만세의 불길은 교동도까지 번져 21일부터 큰 시위가 벌어졌고, 4월 1일에는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돼 13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횃불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4월 9일에는 석모도에도 만세의 외침이 울려퍼졌고, 4월 13일에도 불은면 두운리에서 태극기가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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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진에 대한 검찰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잠잠하던 만세운동은 1년 뒤에도 일어났는데 1920년 7월 15일(음력) 양사면 철산리에서 오용진 등이 집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대한독립 만세, 슬프다, 슬프도다'라는 글을 썼다. 

 

이들은 면 사무소 게시판에 만세 운동을 벌이자는 글을 게시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결국 일제에 발각돼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

3월 18일 대규모 시위 이전에도 강화에서는 일본에 대항한 크고 작은 만세 시위가 있었다. 

 

18일 장터의 만세 소식을 접한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서려다 교장과 직원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59년 발행한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의 경기도편을 보면 3월 12일 오전 읍내 보통학교에서 3·4학년 생도 전부가 집합해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만세를 부르며 운동장으로 나가려 했다는 대목이 있고, 그 다음 날 같은 학교 여자반 100여 명이 학교 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경찰이 학생들을 연행하려고 하자 교장이 나서서 신변을 보호하고 책임을 지겠다며 사건을 무마하고 경찰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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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독립운동기념비. 지난 1994년 강화읍 견자산 내에 세워졌으나 1996년 당시 만세운동 발상지인 강화읍 웃장터(前 은혜교회)로 이전. 이후 용흥궁 공원내로 재이전 건립. /강화군 제공

유봉진이 이끈 강화의 만세운동은 강화 출신의 민족지도자 죽산 조봉암의 마음에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의 불을 지핀 계기가 됐다. 

 

조봉암은 그가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강화 만세운동을 계기로 "일생을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됐다"고 밝혔다. 특히 유봉진에 대해서는 특별한 평가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 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 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볼기 맞은 형벌)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 선생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 했다."

1920년 9월 만기 출소한 유봉진은 북도면 시도에서 사립 신창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몇 해 뒤 강화군으로 돌아와 하도면 내리에 있는 폐교에 노산학원을 다시 개교해 2년 동안 근무하는 등 교육자로 지냈다. 

 

1920년 9월 24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가 출소해 강화에 돌아왔을 때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는 60살이던 1945년 뒤늦게 아들을 낳고 한국전쟁 뒤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 갔으나 1956년 생을 마감했다. 유봉진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그의 부인도 2년 뒤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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