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마흔에도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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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바빴고 늘 허둥거리며 살았고
이젠 '하루치 더 늙었겠지' 무심 속
맞은 나의 마흔,
얼마전 만난 후배는
좀 더 열심히·신나고·즐겁게
인생을 정리한 '건강 삶'… 응원

에세이 김서령1
김서령 소설가
마흔을 앞두었던 겨울, 나는 하도 우울하고 쓸쓸해서 친구들에게 투정을 옴팡 부렸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동갑내기가 아니어서, 한 명은 마흔세 살을 앞두고 있었고 한 명은 서른일곱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사십 대가 된 친구는 심드렁한 얼굴로 "별것도 아닌 걸로 우울해하긴"이라며 중얼거렸고 아직 삼십 대인 친구는 "나도 마흔이 되면 저러겠지"하며 나를 동정했다. 시간을 막을 도리가 없으니 나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마흔 살을 맞고야 말았다.

얼마 전 후배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녀는 내게 반짝 손을 흔들며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언니! 제가 벌써 마흔 살이 된 거 알고 계세요?"



나는 까르르 웃고 말았다. 천방지축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전 세계를 헤집고 여행을 다니던 스무 살짜리가 어느새 마흔이 되었다고? 서점에서 만난 우리는 종이냄새가 물씬 퍼지는 서가를 돌아다니며 늦은 안부를 나누었다. 여전히 그녀는 건강해 보였다. 오래 걸어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여유가 표정에 묻어나서 그런 것이었을 테다. "여행, 할 만큼 했고 직장, 다닐 만큼 다녔고요. 세상에 제가 농사도 지어봤어요. 시골에 땅을 사서요. 신기하지 않아요?" 농사꾼인 적이 있었다는 건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다. 얼굴은 영 서울내기 깍쟁이 스타일인 데다 하늘하늘한 시폰 드레스 차림으로 긴 머리 휘날리며 나온 이 녀석에게 농사라니. 그녀가 보여준 사진 속 농사꾼은 분명 그녀가 맞았다. 목에 두른 수건과 헐렁한 작업 바지마저도 그녀가 입으니 꽤나 힙해 보였달까. 뭐든 즐겁게 했구나, 이 녀석은. 그러니 이렇게 예쁜 마흔 살로 자랐겠지.

손님이 드문 맥주집에 앉아 그녀가 주섬주섬 꺼낸 건 원고 뭉치였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이렇게라도 내 인생을 정리해봐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쓴 원고예요. 언니가 한번 읽어봐 주세요."

그러니까 마흔 살에, 마흔 살을 돌아보며 가만가만 써내려간 에세이 원고 뭉치였다. 나는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이 안에 이 녀석의 지난 삶이 오롯이 담겼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마흔 살을 앞두고 투정을 부린 것 외에 나는 다른 기억이 잘 없다. 물론 삼십 대와 마찬가지로 늘 바빴고 늘 허둥거렸고 어느 때엔 별 이유도 없이 자신만만하기도 했다. 연애를 하기도 했고 소설도 썼고 변함없이 책을 출간하고 번역을 했다. 달라진 건 없었다. 눈가 주름이 더 늘었을까 걱정하며 거울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늘었지만 그 습관도 곧 사라졌다. 주름 따위에 신경을 계속 쓰다간 스트레스 때문에 더 늙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이제는 '하루치 더 늙었겠지, 뭐' 하는 정도로 무심하게 넘길 수 있다.

원고 속 후배의 삶은 참 예뻤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을 조금 더 신나게 하기 위해서 영어를 배웠고 친구들과 파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해 요리를 익혔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 보이차를 즐겼다. 덕분에 영어 관련 일을 하고 있고 요리강좌도 열고 보이차 살롱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이 키운 것들로 배를 채워보고 싶어서 농사도 지었던 거다. 여간 찬연한 청춘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마흔 살이 하도 예뻐 원고를 덮은 후 말을 꺼냈다.

"넌…… 마흔에도 예쁘다."

이번에는 후배가 까르르 웃었다.

"정말 마흔에도 예쁠까요?"

얼마 후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에세이집 제목을 '마흔에도 예쁘다'로 하고 싶다고. 언제쯤 출간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잘 만들어서 세상의 모든 마흔 살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가 되었으면,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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