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으로 독립 실현하려 했던 김환옥

'일제에 짓밟힌 삶' 노동자를 일으켜 민족해방 꿈꾸다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9-10-31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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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클릭아트

일본 대기업 기계·자동화에 조선인 공장들 줄줄이 폐업
사회주의 운동가들 동양방적 등 열악한 환경 파고 들어

광주학생운동 동참으로 퇴학 당한 후 인천철공소 취직
김근배와 독서회 꾸려 문맹률 높은 근로자들 교육 앞장
적색노조 연루 '옥살이' 미군정시절에도 좌익으로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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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끼 식사를 못 해 풀죽을 끓여 먹는 사람이 조선 땅에 한둘이 아니고 고무신 하나가 없어 거친 흙 땅을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지천인데…"

2007년 방영된 드라마 '경성스캔들' 대사 중 일부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나여경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1930년대 나라 잃은 조선인 노동자들은 온갖 신산을 다 겪어야 했다.

 

1929년 10월 29일 미국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한 '블랙먼데이'를 기점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이역만리 떨어진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대공황 이후 일제는 '산업 합리화' 조치를 시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일본인이 소유한 대기업들은 거대 독점자본을 바탕으로 한 기계화·자동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대기업의 생산 공정 기계화, 자동화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조선인이 운영하던 중소규모의 공장들은 문을 닫게 됐고, 조선인들의 실업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1930년 조선총독부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조사에 참여한 조선인 17만명의 12.5%에 해당하는 2만여명이 실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업률이 높아져 일할 사람은 많다 보니, 노동자들의 임금도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계청이 일제강점기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925년 93전이었던 보통 인부의 일당은 1933년 70전으로 24%나 줄었다.

1930년대 80㎏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22원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하루 종일 일해도 쌀 2.5㎏ 정도 밖에 살 수 없는 돈이었던 셈이다.

일본 내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률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상황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1930년대 대형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인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양방적이나 인천 지역 정미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근로자들은 휴일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 속으로 파고 들었다.

김환옥
김환옥

김환옥(1914~?)은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김환옥의 직업은 직공(職工)이라고 적혀 있다. 학창시절 일제에 항거하다 학교를 떠난 김환옥은 노동자로 일하며 그들에게 노동정신을 가르쳤다.

김환옥은 이른바 '적색 노조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지만, 인천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환옥의 활동 대부분이 노조 활동에 집중돼 있는 데다, 해방 이후에는 좌익 사범으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고 말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그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가 뒤로 밀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따르면 김환옥은 1914년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용정리(현 인천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태어났다. 

 

이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1927년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인천상업학교 입학 후 김환옥은 독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다.

김환옥이 3학년이던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인천상업학교는 인천 지역에선 유일하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다. 

 

일본 경찰 내부 자료에 따르면 김환옥은 그의 동기생인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과 함께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 경찰에 붙잡히게 된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학교에서는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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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 김환옥의 재판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김환옥은 인천철공소에 취직해 본격적인 노동 운동을 시작했다. 인천철공소는 1904년 인천 내항 1부두와 갑문 사이에 있던 '사도'라는 섬 주변을 매립해 만들어진 조선소로 추정된다.

1930년대 인천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이재유(1905~1944), 그와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이룬 김삼룡(?~1950)의 지시를 받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석동 일대 공장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인천 노동자들의 환경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이다. 인천 노동자들이 처한 암울한 상황은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의 등장인물 간난이가 주인공 선비에게 말한 대사를 통해 잘 나타난다.

"선비야! 그런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저 봐 지금 야근까지 시키면서 우리들에게 안남미 밥 먹이고, 저금이니 저축이니 그럴듯한 수작으로 우리들을 속여서 돈 한 푼 우리 손에 쥐어 보지 못하게 하고 죽도록 우리들을 일만 시키자는 것이란다. 여공의 장래를 잘 지도하기 위하야 외출을 불허한다는 둥 일용품을 저가로 배급한다는 둥, 전혀 자기들의 이익을 표준으로 내세운 규칙이란다."

'인간문제'에서 간난이와 선비가 있는 방적공장은 1934년 문을 연 인천 만석동의 '동양방적'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공장주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일당을 착취했다. 산업합리화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계가 들어왔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낮아졌고, 오히려 근무시간만 길어지게 됐다.

김환옥은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 하나인 김근배와 노동자를 교육하는 독서회를 꾸렸다. 김환옥이 활동하던 시점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문맹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 조사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의 주된 연령층인 15~39세 노동자들의 문맹률은 65%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김환옥은 문맹자들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게 만들기 위한 교육을 진행했다. 

 

국내 노동운동사를 연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김경일 교수가 쓴 '이재유, 나의시대, 나의혁명'에 따르면 김환옥은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인천축항, 월미도 등지에서 노동자들에게 기꾸쿠다 가츠오의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를 교재로 수십 차례에 걸쳐 교육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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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양방적 등 노동투쟁을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독서회를 운영하던 그는 1935년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적색 노조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1935년 4월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인천 적색(赤色)그룹 사건 검거에 관한 건'이란 보고 문서에선 '이재유 그룹의 사건을 수사하던 중 그룹에 속해 있던 이인행이 인천 활동가와 접촉했다는 진술을 했고, 이 진술을 토대로 별개의 비밀결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단서를 찾았다'고 적었다.

김환옥은 동양방적과 인천철공소 등에서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 속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주도해 쟁의 행위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그는 지하 운동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속해 노동운동을 펼치다 1947년 2월 불법 노조설립과 시위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됐다. 안타깝게도 출옥 이후 김환옥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김환옥은 노동 운동을 바탕으로 사회의 변혁을 꿈꾼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김환옥을 포함한 1930년대 활동하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조선 내에 공산당 세력 확장을 위해 노동자들을 포섭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조선의 독립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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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옥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직업란에 직공(職工)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하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부인 이재유의 글을 보면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우선시했다. 

 

이재유는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의 기관지인 '적기' 창간선언에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비밀에 대한 정치적 폭로와 항의 투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밝히며 목표를 분명히 했다. 

 

또 '군사적 경찰적 파쇼적 일본제국주의 조선통치권력의 근본적 전복. /조선의 독립/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정부 수립'이라는 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재유와 김환옥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김환옥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준 김삼룡과 권영태가 이재유와 교감을 나누고 있던 점을 고려하면 김환옥도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힘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1918)을 모델로 한 사회 변혁을 꿈꿨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의 청년들은 사회주의로 전향했다"고 설명했다.

 

이성진 대표는 또 "김환옥은 노동 운동을 통해 일본 제국의 붕괴를 바랐고, 조선의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라며 "인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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