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일제에 맞서 문 닫은 상인들… 10대 소년들이 맨 앞에 섰다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9-11-07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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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1919년 학생 동맹휴업 이어 3월30일부터 실행
18세 잡화상 김삼수·15세 객주집 사환 임갑득
폐점 안한 가게에 독촉 경고문 배포하다 '체포'

인천물산 객주조합원·권업소원·포목상조합 등
1926년 4월 순종 승하때도 철시… 봉도식 진행
생계 걸고 日에 대항한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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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기 이전부터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수탈의 관문이었다.

 

당시 인천부는 일본이 '조선 안의 작은 일본'을 목표로 만든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인천부 인구 2만211명 가운데 44.4%인 8천973명이 일본인일 정도로 다른 도시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인천 시내 중심에서는 3·1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6일부터 인천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며 시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곧 인근 지역까지 들불처럼 번졌다.

3·1운동 때 인천지역 상인들은 가게를 닫아버리는 '철시(撤市)' 투쟁으로 항일시위에 동참했다. 

 

'작은 일본'이라 불린 도시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생계를 접고 항일의 뜻을 표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면, 인천 시내 조선인 상점들은 만세운동이 이어지던 1919년 3월 30일부터 철시투쟁에 나섰다. 

 

당시 인천은 내리(현 중구청 일대)부터 지금의 동구까지 시내 중심가를 이루며 상점이 모여 있었다.

임갑득 일제감시대상카드
일제감시대상 인물 카드 속 김삼수(왼쪽)와 임갑득. 두 사람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나이는 김삼수가 18세, 임갑득이 15세였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인천에서 철시투쟁과 관련해 처벌받은 김삼수(金三壽·1901~?)와 임갑득(林甲得·1904~?)의 상고심 판결문에는 3월 27일부터 인천 시내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3월 27일은 조선인 가게들에 3·1운동 때 맞춰 창간된 '조선독립신문'과 함께 "철시하라"는 격문이 배포된 날이다. 

 

인천부협의회 등 친일기관이 개점하라고 협박했지만, 3월 30일부터 조선인 상점 대부분이 철시투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이 출동해 상점 문을 열도록 협박하면 눈가림으로 문을 열다가도 경찰이 돌아서면 이내 다시 문을 닫으며 항쟁을 이어갔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19년 4월 1일자 신문에서 "인천 시내는 그동안 평온한 듯하더니 다시 불온한 모양으로 변하며 수일 전에는 조선인 상점이 얼마만 철시한 것을 보겠더니 삼십일부터는 모두 철시를 했다"고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이 기사에서 가게들이 휴업한 시내를 "길거리에 행인도 없다"며 "음습하여 쓸쓸하기가 한량 없다더라"고 부정적으로 보도했는데, 철시투쟁이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삼일운동비사'에서도 인천지역 철시와 관련해 "시가지는 인적이 고요했고, 해변의 파도 소리만 시가지를 울렸다"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

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1일 오전 11시께 아직 폐점하지 않은 우각리 이복현(李福鉉) 등의 점포 17곳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렸다. 

 

하지만 우각리 일대에서 상점이 문을 열자 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2일 또다시 "인천에 있는 상업가가 폐점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는 초토화할 것"이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작성해 상점들에 배포했다. 

 

이들은 4월 3일에도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취할 것"이라고 쓴 '최후통첩문'을 내리에 있는 점포에 투입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인천시민 봉도식
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신문에 실린 '인천시민 봉도식' 사진. 순종이 승하한 후 인천지역 상인들이 철시한 후 봉도식을 가졌다는 내용의 기사다.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김삼수와 임갑득의 1심 판결문을 보면 죄명은 '보안법 위반'과 '강요미수'이다. 

 

김삼수는 당시 18세에 직업은 잡화상이었고, 임갑득은 15세에 직업은 객주집 사환이었다. 상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10대들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선 것이다. 

 

사법경찰관 측 증인으로 조사받은 주명서(朱明瑞)는 "1919년 3월 30~31일 폐점했으나, 경찰관의 간곡한 설득으로 개점했는데, 다음날 오후 8~9시 무렵 김삼수와 임갑득이 쓴 경고문을 받았다"며 "다소 무서웠지만 폐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김삼수와 임갑득은 1심에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임갑득은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됐고, 김삼수는 상고심을 거쳐 1심과 마찬가지인 징역 10개월이 확정됐다. 

 

이들은 항소, 상고 과정에서 앞선 판결에 불복하는 이유를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발동이며 범죄가 아니다"라고 했다.

김삼수는 상고심을 진행하면서 경성고등법원에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를 별도로 제출했다. 

 

상고 이유를 살펴보면, 단순히 10대 소년들이 의협심에 불타 감정적으로 철시투쟁을 독려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김삼수가 법정에 낸 상고이유서의 내용 일부다.

'이번 조선민족의 행위는 세계의 대세에 따라 정의와 인도에 기초하여 의사를 발동한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바이다. 누천(累千)여 년 이래 역사상 또는 민족상에서 보아도 일·선의 합병은 불가사의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0년 전 일·선 합병은 당시 야심 발발(潑潑)한 일본정치가가 외람(猥濫)하는 수단으로써 금력(金力) 의해 취한 바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금력(金力) 또는 무력으로써 인심을 복종시킨 적이 있음을 듣고, 게다가 일·선 합방 이후 대일본제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정책이 어떠했는지가 순전한 만종(蠻種)으로서 보인 것이며, 이러한 압제적 통치 아래에서는 영적 능력이 불구(不具)한 야만족이라고 해도 불평을 품는다.'

또 상고이유서의 다음 내용을 보면, 3·1운동의 사상적 기반 중 하나였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잡화상인 김삼수처럼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도 가늠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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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 철시 풍경을 다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1919년 4월 1일자 기사. 출처/국립중앙도서관

'눈을 들어 세계를 보라. 누가 사람의 노예가 될 자가 있겠는가. 쓸데없이 빙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번 미국 대통령 윌슨 씨가 성명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부흥한 국가가 많이 있는데, 대일본제국에서는 반드시 영국의 인도에 대한,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것을 빙자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해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얼마나 압제적인지 얼마나 속박적인지 이로써 영국령 인도, 미국령 필리핀과 비교할 것이 되겠는가. 언론·출판·집합의 자유는 존중히 여겨야 할 것임은 물론 인류의 공권까지 박탈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윌쓴 씨가 성명한 민족자결은 동양에 있는 우리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지원(至遠) 지대(至大)한 것이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019년 쓴 '만세열전'에서 "민족자결주의는 해당 제국주의 국가에서 국내적인 수준으로 제한됐던 민주주의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확대하는 효과도 낳았다"며 "윌슨의 생각은 일정한 경로를 거쳐 조선인들에게 전해졌다. 이것이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김삼수는 상고이유서에서 "우리의 행위를 일본 법률에 준해 징역 10개월에 처단했는데, 참으로 웃을 수 없지 않은가"라며 "당당하게 정의·인도를 위해 행동한 우리들은 정의와 인도에 위배하는 대일본제국 사법권 내의 절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상고 신청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는 "자기가 사실로 말하는 바를 진술하고, 자기의 의견에 의해 피고의 소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니 상고 이유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고, 김삼수는 징역 10개월 확정 판결을 받았다.

상고심 판결문 원본
김삼수·임갑득의 상고심 판결문 원본 첫 장. 출처/국사편찬위원회

김삼수의 직업이 잡화상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상고이유서 내용이 너무나 논리 정연하다. 

 

노련한 변호인이 작성했을 법한 내용들이다. 일반 민중들이 쓸 수 있는 용어들도 아니다.

이들의 뒤를 받쳐주던 항일운동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삼수와 임갑득 같은 평범한 민중들이 어느 조직에 들어가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공부를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이후 김삼수와 임갑득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동아일보 1922년 4월 2일자 신문을 보면, 민족운동을 펼쳤던 기독교 소년운동단체인 인천 '엡윗청년회'(의법청년회) 주최 토론회가 열렸다는 내용의 기사에서 '김삼수(金三壽)'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같은 인물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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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 상인들의 철시는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 또다시 일어났다. 

 

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기사에는 그해 4월 30일부터 인천물산 객주조합원, 인천미상조합원과 권업소원, 인천포목상조합이 잇따라 가게 문을 닫고 순종의 봉도식을 진행했다.

인천지역 상인들의 철시투쟁은 소극적인 항일운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의 문을 스스로 닫는 것은 생계가 걸린 문제였고, 상인들은 생계를 걸고 일본에 대항한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김삼수처럼 평범한 민중도 뚜렷한 민족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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