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리뷰]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라, '산책자의 행복'

편지수 기자

입력 2019-11-14 11:46:28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2019111301000880000041781.jpg
연극 산책자의 행복 /산책자의 행복 공연팀 제공

"미치도록 살고 싶어, 메이린."

바짝 따라붙어 미영을 위협하던 검은 개는 사라졌다. 철학 강사이던 시절 "한때 죽음에 매혹"당했던 그는 이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공에 돌을 집어 던진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으라고 말하던 미영은, 아무 의미 없이 끝없는 길을 걸으며 되뇐다. '미치도록' 살고 싶다고.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초연한 연극 '산책자의 행복'은 제17회 이효석문학상을 받은 조해진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 소설은 20년간 철학과 강사였던 세계를 닫고, 삶의 무대를 강당이 아닌 편의점으로 옮긴 50대 여성 미영의 이야기다. 경제적 위기와 맞물린 소외와 불안의 문제를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섬세하게 포착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몸'과 '여자'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연극을 만드는 '사막별의 오로라'는 이 소설을 무대로 옮기면서 몸의 언어를 더했다.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자아실현에서 온다. 그러나 자아실현은 가장 상위 단계의 욕구로,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의식주와 안전을 확보했을 때 가능하다. 학과 통폐합으로 오랫동안 해오던 철학 강사 자리를 잃고 개인 파산을 신청한 미영은 임대 아파트로 간다. 기초생활 수급자가 된 그는 편의점에서 일하며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생존은 스스로 해결하되 세상이 인정하고 우대해주는 직업에 연연하지 말라"던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옛 제자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아내와 사별한 편의점 사장을 보며 삶을 위탁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도 한다.

2019111301000880000041782.jpg
연극 산책자의 행복 /산책자의 행복 공연팀 제공

그의 옛 중국인 제자 메이린은 독일의 소도시에서 답장이 없는 편지를 보낸다. 미영을 교수님이라는 딱딱한 명칭 대신 '라오슈(老師)'라고 부르며 따르던 그였다. 과거 한국인 친구를 잃고 힘겨워하던 메이린에게, 미영이 건넸던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일종의 버팀목이 됐다. 그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산책을 할 뿐이지만 "마침내 살아 있다"고 말한다. 이런 메이린의 이메일에 답장할 수 없는 미영은 실존을 위협당한 순간 메이린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낀다. 삶에서 가장 괴롭고 비참한 순간, 연령도 국적도 다른 두 사람은 서로의 삶 속에서 빛처럼 반짝인다.

연극은 80분 동안 원작 소설에서 발췌한 서술을 읽어나가며 배우들의 몸짓에 집중한다. 책상 위에서 몸을 기울인 채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불안하게 비틀거리던 메이린에게 미영의 말은 하나의 손짓으로 닿는다. 두 손을 맞닿은 두 사람은 하나의 몸처럼 포개졌다가 천천히 멀어진다. 편의점의 카운터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구길 때,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부정할 때마다 미영의 몸짓은 기괴해진다. 팔과 다리를 반대로 꺾고 몸을 한껏 움츠린 미영의 모습은 강단에 당당하게 서 있던 그와 대조된다. 수십년 간 자신이 흠모하던 철학자들의 말과 현실이 대치될 때, 미영은 자신의 온 몸을 발광하듯 격렬하게 떤다. 지구 반대편 메이린이 듣던 격렬한 록음악에 맞춰 몸을 떨던 미영은 검은 봉투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간소한 무대 장치에 영상이 어우러진 연출도 돋보인다. 편의점 카운터와 메이린의 책상, 벤치 하나가 전부인 좁은 무대를 오롯이 배우들의 연기로 채운다. 중간중간 메이린의 타자 입력에 맞춰 무대 뒤쪽 스크린에 떠오른 커서, 손짓 한 번에 지워지는 과거 미영의 말 등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연극 '산책자의 행복'은 오는 17일까지 매일 오후 8시 서울 중구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볼 수 있다.

/편지수기자 pyunjs@kyeongin.com

편지수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