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40)]후손 찾는 독립운동가들

항일투쟁 인정받은 '그날들'… 집에는 돌아가지 못한 '이름들'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독립유공자 훈·포장 전달 못한 인천 출신 인물 21명 달해

강화 본적 지홍윤·김덕순·서영백·정도향·이재향 '의병투쟁'
권태철·정홍문·장연실·최공섭·황준실 만세시위 적극 가담
이건영·장라득·방한조·김윤원은 미국·쿠바등 해외서 활동
감옥서 숨진 유갑순… 여성운동가 유점선·최덕임·장상림도

인천 본적 정기인·황칠성·유완무도 잊지 않도록 재조명해야




2019121801001055700052807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행적이 재조명된 경우도 많다. 

 

항일투쟁에 몸 바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절명해 후손을 보지 못했거나 어려운 삶을 살다 후손마저 뿔뿔이 흩어져 찾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의 훈장과 포장이 국가보훈처에 6천여 개나 쌓여있다.

국가보훈처는 정부가 독립유공자에게 추서한 훈장을 유공자 본인 또는 직계 후손에게 전달한다. 직계 후손이 없을 때는 적정한 방계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후손들이 독립운동가의 추모사업을 주도하거나, 집안에서 전해지는 자료를 보관하다 추가로 독립운동 행적을 발굴하는 경우가 많다. 그 후손들이 없으면 보훈처가 보관한다.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1만5천여 명 가운데 훈장과 포장을 후손에게조차 전달하지 못한 인물은 올 12월 기준으로 5천984명에 달한다. 

 

북한이 본적인 경우가 가장 많고, 본적이 명확하지 않거나 해외에서 활동해 후손 추적이 어려운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은 후손이 없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잊힐 수밖에 없는 처지다. 후손을 찾지 못한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꾸준히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하는 게 인천의 책무일 터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천을 본적으로 둔 독립유공자 가운데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은 21명이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본적을 '인천'과 '강화'로 분류하고 있는데, 강화사람이 17명으로 가장 많다. 인천 본적은 4명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행정구역이 광역시가 된 현재의 인천 행정구역보다 훨씬 작았고, 본적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도 상당수이기 때문에 국가보훈처 자료가 인천 모두를 포괄한다고 볼 수는 없다.

 

본적이 인천은 아니지만,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도 더 있을 게 분명하다.

강화에서는 일본이 국권 침탈을 본격화하던 조선 말기 격렬한 '의병투쟁'과 1919년 3월 1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강화지역 독립유공자 17명 중 의병투쟁과 만세운동에 각각 5명이 투신했다.

강화진위분견대 장교였던 지홍윤(1865~1909)은 1907년 8월 9일 일본의 군대 해산에 반발한 진위대 봉기를 주도하며 강화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황준실 감시대상 카드
1920년 강화 양사면에서 대규모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른 황준실 지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후 지홍윤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황해도 해주로 탈출해 그 지역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다가 일본 밀정의 고발로 체포돼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지홍윤이 충분히 가족을 꾸렸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는 있으나, 1991년 애국장 서훈을 받은 지 30년 가까이 후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덕순은 1908년 6월부터 강화 교동을 중심으로 의병을 꾸려 일본 선원과 밀정을 처단하다가 붙잡혀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서영백(1878~?)은 1908년 초 40여 명 규모의 김태의 의병부대에 합류해 총기와 군도로 무장하고 강화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혔다. 

 

그는 내란죄로 기소됐으나, 재판 과정에서 강도죄로 바뀌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서영백의 판결문에는 '법무대신 고영희(高永喜)' 명의로 일본인 재판장에게 "서영백을 특별히 본 형에서 한 등급을 감한다"는 임금의 뜻이 있다는 훈령을 내린 후 종신형으로 감형받은 내용이 있다.

정도향(1867~1908)은 1908년 9월부터 강화도의 장사들을 모았다는 이능권(1864~1909)의 의병부대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陳)에 가담했다. 

 

정도향은 의병부대에서 관헌의 동정을 살피고, 부대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 20일 일본 경찰에 의해 참살당했다.

 

이재향(1875~?)은 강화 석모도 출신인데, 1908년 충북 청원군 일대에서 유현서(1882~1909) 의병부대원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된 기록이 있다.

후손을 찾지 못한 강화지역 만세운동 유공자들은 대부분 1919년 3월 18일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끈 대규모 강화 읍내 시장 시위에 참가했다. 

 

권태철(1897~?)은 강화 만세시위 때 신문리 시장에서 큰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건영 잡화상 운영 기사
미국에서 활동한 강화 출신 이건영 지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잡화상점을 운영한다는 '신한민보' 1919년 3월 22일자 기사. 출처/공훈전자사료관
 

강화경찰서 순사 김덕찬이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권태철은 오른손으로 기를 붙잡고, 왼손으로 김덕찬의 따귀를 쳤다. 체포된 권태철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정홍문(1888~1928)은 유봉진과 함께 강화경찰서 앞에서 3시간 동안 "앞서 유치한 사람을 석방하고, 시장에서 칼을 뽑았던 김 순사를 쳐서 죽일 터이니 인도하라"고 외쳤다. 그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장연실(1868~?)과 최공섭(1902~?)도 이날 강화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체포돼 처벌받았다. 황준실(1902~?)은 1년 뒤인 1920년 양사면 철산리에서 오용진 등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발각돼 징역 1년형을 받았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사람들도 눈길을 끈다.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이들의 후손은 찾을 길이 더욱 막막하다.

강화 길상면 선두리가 본적인 이건영(1886~1939)은 1910년부터 1930년까지 미주지역 한국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원·회장, 로스앤젤레스지방회 경찰원·대의원·총무, 뉴욕지방회 총무 등을 지냈다.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를 보면, 이건영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육십원 잡화상점'이라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금과 국민의무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신한민보' 1939년 12월 7일자 신문에는 그해 12월 1일 이건영이 뉴욕에서 별세했다는 부고가 실렸다.

강화 길상면 온수리가 본적일 것으로 추정되는 장라득(1879~?)도 1908년부터 미국 오클랜드 등지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해방이 될 때까지 여러 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돼 2017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

방한조 광복군후원금
쿠바 하바나에서 대한인국민회 하바나지방회 총무를 맡고 있는 강화 출신 방한조 지사가 광복군후원금을 걷는 데 쉬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신한민보' 1941년 5월 8일자 기사.

1910년대 멕시코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대 쿠바로 건너간 방한조(1886~?)는 강화 선원면 창동이 본적이다. 

 

해방 때까지 쿠바 한인단체 임원을 역임하면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는데, 2018년에서야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멕시코에서 한인 이민자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 김윤원(1877~1920)도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다.

서울 경신학교 학생이던 강화 화도면 출신 유갑순(1892~1921)은 1920년 5월 서울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교통국 경성 담당 이원직(?~1945)에게 임정이 발행한 공보와 독립신문을 받고, 이를 배포하기 위한 자금과 동지를 모으다가 체포됐다. 

 

유갑순은 주변 사람들에게 임시정부 총감부 명의 특파원증을 보이며 "우리들 청년이 묵시할 시대가 아니다. 서로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설명했다는 기록이 판결문에 나온다.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갑순은 1921년 6월 27일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여성 유점선(1901~?)도 강화 출신이다.

 

1930년 1월 16일 서울 경성여자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광주학생운동 영향을 받아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참여하다 구류 20일 처분을 받은 최덕임(1912~?)도 강화 출신 여성이다. 

 

유갑순 감시대상카드
상하이 임시정부 공보물을 배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숨을 거둔 유갑순 지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같은 시기 서울 근화여학교 2학년에 다니면서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동참한 여성 장상림(1913~?)은 인천 화평동이 본적으로 나온다. 최덕임과 장상림은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인천 출신 정기인(1888~?)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경기도 용인, 광주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역시 인천 출신인 황칠성(1894~?)은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수원 송산면 사강리(현 화성시)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다 붙잡혀 징역 7년형을 받았다.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백범 김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고, 훗날 백범을 만나 김창수였던 이름을 김구(金龜)라고 고쳐주기도 한 민족운동가 인천의 유완무(1861~1909) 역시 서훈을 전달받을 후손이 없는 상황이다. 

 

유완무는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경인일보 포토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박경호기자 기사모음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