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41·끝)에필로그]이어붙인 기억의 조각 '독립운동' 집대성 출발점 되길…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9-12-26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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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스치듯 지나가는 임정수립 100년 아로새기기 위해
1년 동안 '인천과 독립운동' 하나로 묶는 데 집중

항일투사들 '유배지' 기능에 초점 맞춰 시작
강화 등 외딴섬까지 지역 3·1운동 범위 넓혀

사진 없거나 수의 입은 모습이 대부분 안타까워
소중한 자료 제공한 후손·독자들 관심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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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인천'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올해 1년 동안 이어 온 이유이자 목표였다. 

 

인천에는 생각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애국지사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생각보다도 더욱 희미해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초적인 데이터조차 정리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2019년은 독립운동 재조명 열풍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지만, 그 열기는 3·1절을 거쳐 현충일이 지나면서 금세 식었다. 

 

돌이켜 보면 인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쳐 가는 '100년'을 붙잡아 인천의 것으로 아로새기는 건 취재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끌고 오면서 잊힐 대로 잊힌 인천의 독립운동을 되살리려 애썼다.

초반부에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던 인천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국사학자·국어학자·민속학자·교육자·언론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의 유해가 올해 4월 22일 카자흐스탄에서 6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계봉우 선생의 유해 송환을 언급하며 "우리의 보훈은 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취재팀은 계봉우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년 동안 인천 영종도의 어촌마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는 영종도를 떠나면서 '봄날'에 빗댄 조국의 독립이 찾아오길 희망하는 시를 남겼다.

강화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진위대장 출신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가 대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단체 '성명회'를 조직한 오주혁(1876~1934)도 소무의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같은 시기 500여m 건너편 대무의도에는 이동휘가 유배 중이었다. 

 

이동휘와 오주혁은 유배 이전부터 이미 교류가 있었고, 이후 활동에서도 접점이 있어 이들이 유배생활 중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것으로 연결지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강화 석모도로 유배된 이안득(1900~?)은 유배지 석모도의 3·1운동을 주도했다. 묻혀 있던 이안득의 석모도 3·1운동 역시 경인일보 연중기획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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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3·1운동은 100년이나 지났는데도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로 한정된 통계로 축소된 채 통용됐다. 

 

1만 명이 참가한 강화 만세운동, 부평·계양지역과 외딴 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까지 포함해서 인천지역 3·1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좌익과 우익이 합세해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항일단체였다. 인천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신간회 인천지회를 처음으로 다뤄 연구자들로부터 후속 연구의 길을 텄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천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평가받아야 할 '유관순의 스승' 김란사(1872~1919)는 그 유명세에 비해 출생 연도조차 불확실했을 정도로 연구가 깊게 이뤄지지 못했다. 

 

김란사의 후손으로부터 남편 하상기(1855~1920)의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최초로 확보해 그가 태어난 해를 1872년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김란사가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는 추후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았다.

인천 항만업계를 이끈 기업인 배인복(1911~1997)이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후원하는 '상인독립군'으로 활동한 행적을 인천은 놓치고 있었다.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이 14세 소년 시절 용동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가 그동안 몇이나 됐을까.

의사 출신 이민창, 육혈포로 자결한 정재홍(1867~1907), 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 부평 조병창에서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펼친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 노동운동가 김환옥(1914~?),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한 이두옥(1911~1950)과 신대성(1909~?), 인천 섬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인천사건'의 윤응념(1896~?) 등은 여전히 우리가 소홀히 대해 온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의 나머지 행적을 추적하는 후속연구가 앞으로의 과제다.

백범 김구(1876~1949)와 인천의 깊은 인연은 이미 널리 알려진 듯하지만, 전문가들 역시 인천과 백범을 연결짓는 폭과 깊이에 있어서는 부족했다.

 

시선을 조금 돌려서 들여다보니 백범의 생소한 인천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왔다. 김구가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출할 때 사용한 무기 겸 탈출도구인 '삼릉창'(三稜槍)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아버지 김순영이 옥중의 김구에게 몰래 넣어준 삼릉창은 그것을 제작했을 옛 인천의 대장간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인천에서 김구의 옥바라지를 한 '임시정부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있는 인천대공원, 김구의 탈옥을 도왔다고 주장한 감리서 순검(경찰) 이야기를 담은 대중일보 1946년 4월 17일자 기사에 다시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인천의 독립운동은 다국적이었다. 강화 출신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는 이역만리 멕시코로 이민을 떠나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한인사회를 개척하며 독립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웠다. 

 

미국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조광원(1897~1972) 신부는 미 해병대 종군신부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사이판전투에서 강제징집돼 포로가 돼버린 동포들을 구출해냈다.

장봉도 태생 의열단원 이을규(1894~1972)·정규(1897~1984) 형제는 중국 각지를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 옥고를 치렀다. 

 

인천이 낳은 거물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9~1959)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강화학파 유학자 이건승(1858~1924)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 서간도로 망명해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생전의 사진 한 장조차도 남기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취재할 때는 그렇게도 서글플 수가 없었다. 

 

자료를 뒤적이다 어렵게 건져낸 초상은 일제가 그들을 형무소에 가두거나 감시하기 위해 찍은 '감시대상 인물카드' 속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의를 입은 사진이 유독 많았다.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일제가 남긴 그 자료를 통해서 후대에 기억돼야 한다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후손을 찾지 못해 국가가 추서한 훈장조차 전달받지 못한 채 잊혀 가고 있는 인천 독립유공자들의 이름도 계속해서 되뇌어야 한다.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지난 1년간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담고 이어붙인 결과물이 인천의 독립운동을 집대성하는 출발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중기획을 마친다.

 

어려운 발걸음으로 취재팀을 만나 소중한 자료를 선뜻 내준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취재팀에 조언을 아끼지 않은 전문가들 그리고 많은 관심을 보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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