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원주 부론의 거돈사지

김인자

발행일 2020-02-21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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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역사 품고 잔잔해진 폐사지
기단 돌·나무·새들마저도 고요
앞쪽 중앙엔 삼층석탑만 덩그러니
정산저수지 둑에 앉아 내려다보며
늙은나무 향해 나만의 의식을 한다


에세이 김인자2
김인자 시인·여행가
어느 시인은 부론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나는 부론을 눈앞에 두고 어디쯤에서 길을 버린 걸까. 예기치 못한 만추 풍경에 끌려 두 번이나 다른 길로 드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럴 때 이것이 일이 아니고 여행이라 생각하면 초조나 불안이 안도로 바뀌는 건 신기하다.

나는 차장을 열어 싸한 바람을 들이킨 후 마음을 다독여 달리기 시작했다. 자동차는 남한강을 끼고 여주를 지나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얌전히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갔다. 오른쪽에는 붉은 함석지붕을 가진 작은 폐교건물이 눈에 들어오고 왼쪽으론 석축 기단 모서리에 서있는 한 그루 노거수, 내가 찾고자 했던 바로 그곳인가 싶었는데 역시 이런 예감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때는 만추였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저녁 답이었다. 곧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 부론 어디쯤에서 돌아갈까 하다 예까지 왔으니 거돈사지는 보고 가야지 하면서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어느 해 거돈사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은 금세 날이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려 변변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한 채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가. 거돈사지는 내게 그냥 뭔가 보여주려다 보여주지 못한 그 무엇으로 남았던 폐사지였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고 나는 지난 늦가을 다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시간에 쫓기지 않으려고 조금 일찍 서둘러가서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다. 빈 절터에 서서 지난 시간의 흔적을 지켜본다는 것이 딱히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나답지 못하게 왜 이제야 하는 것인지.

그래, 다 왔다. 거돈사지다. 나는 천년의 나이를 가진 느티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햇살이 노거수 아래로 부서져 내렸다. 굳이 외면하고 싶은 것들은 늘 왜 그리도 눈에 잘 들어오는지. 운전석에서 차 문을 열고 왼 발을 땅에 놓고 일어서려는 순간 자연스럽게 살짝 아래로 닿은 시선, 석축 사이에 기다란 무엇이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나의 나쁜 시력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상을 고무시키는데 일조를 해온 건 사실이다. 저게 뭘까? 어찌 보니 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것도 같고 그게 아니면 뭔가 산 녀석이 꿈틀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노라니 나의 생각은 이미 추월선을 넘었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심호흡을 하고 몸을 낮춰 가만히 들여다보니 맞다. 뱀의 허물이다. 어쩌면 돌과 돌 사이에 한 생의 풍파를 감당한 제 몸의 껍질을 철저히 인간의 눈높이를 무시하고 저토록 가지런히 벗어둔 채 뱀은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느티나무 아래나 모퉁이가 닳은 삼층석탑 어디쯤에서 이른 동면에 든 건 아닐까.

무심한 듯 생각이 많아지는 곳으로 폐사지만 한 곳이 있을까. 한때는 건물과 승려와 부처님의 말씀이 그리워 찾아온 불자들로 붐볐을 이곳, 비어있다는 것, 오래되었다는 것, 황량하다는 것, 숱한 역사를 안고 사라졌으나 영 지워지지 않는 그 무엇들, 세월이 흘러 모두가 평면으로 잔잔해진 이곳 폐사지, 기단을 둘러싼 돌도 나무도 심지어 새들도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절대 고요, 그것을 대변하는 조형물, 바로 폐사지에 남아있는 고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석탑이 아닐까 싶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앞쪽 중앙에 위치한 삼층석탑을 향해 걸어가는데 발밑으로 무언가 스멀거리는 듯한 이 간지러움의 정체는 뭘까.

기록을 보면 원주는 남한강을 따라 100여개의 절터가 흩어져 있었으나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남아있는 폐사지로는 거돈사지, 흥법사지, 법천사지다. 모두가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거돈사지는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로 추측되는 금당터와 불좌대, 그 앞에 삼층석탑이 전부지만 세 개의 절터 중 가장 넓고 주변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한나절 탑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근처 현계산자락에서 발원한 정산저수지 주변을 둘러보고 저수지 둑에 앉아 거돈사지를 내려다본다. 무심한 세월을 대변하듯 천년을 고독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늙은 나무를 향해 나만의 의식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운다. 매번 이런다. 서둘러야겠다. 쫓기듯 서두르지 않고 돌아가는 길은 없는 걸까.

/김인자 시인·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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