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3)]영종도 염전

세월의 파도에 씻겨나간 소금밭, 고달픈 영종사람들 밥그릇이었다

정운 기자

발행일 2020-02-27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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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건대염전을 복원해 운영하는 씨사이드공원염전체험장. 건국대학교가 조성한 건대염전은 이후 매각되면서 금홍염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이곡 '소금 굽는 연기'… 영종염전 천년 증언
現 주안국가산단 자리 1907년 국내 첫 천일염 생산
영종 '자염' 쇠퇴… 1950년대부터 천일염전 들어서

한국전쟁후 정착 실향민, 염전개척 공동주 되기도
대이어 수십년 '염부' 주민들… 소유 대부분 외지인
홍대·건대도 운영… 인천공항 건설로 대부분 폐쇄
1곳만 남아 옛방식 고수… 씨사이드파크에 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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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는 명실상부한 '공항도시'다.

 

영종도에서는 인천국제공항을 매개로 물류, 관광, 항공 등 다양한 분야의 경제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인천공항이 들어서기 전 4개의 작은 섬이었던 영종·용유지역(영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은 '염전'이 최대 경제 축이었다. 

 

영종도 주변 갯벌은 수심이 얕아 둑을 쌓고 매립해 염전을 만들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매립방식의 천일염전 이전부터 영종도는 염전의 땅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영종도는 소금 생산지였다. 고려 후기 문신 이곡(李穀, 1298~1351)의 시와 산문을 엮은 '가정집(稼亭集)'에 영종도의 염전 얘기가 전한다.

"가는 도중에 자연도에 들러서 /뱃전을 치며 한가로이 읊조리노라 / 갯벌은 전자(篆字)처럼 꼬불꼬불 무늬 지고 / 돛대는 비녀처럼 배 위에 꽂혀 있네 / 가까이 물가에 비끼는 소금 굽는 연기요 / 멀리 산 위로 떠오르는 바다의 달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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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자연도(紫燕島)는 영종도의 옛 이름이다. '소금 굽는 연기'라는 대목에서 자염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염(煮鹽)은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영종도에서 자염 방식의 소금 생산은 1천년 가까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1940년대에도 자염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1936년생 김홍일씨는 "소학교(초등학교)때 만해도 장작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 송산(현 중구 중산동)에 있었고, 화력염전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화력염전'은 장작을 때서 바닷물을 끓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화력 좋은 장작을 구하기 위해서는 근처에 울창한 산림이 필요했다. 비용이 많이 들었다.

 

천일염전이 생겨나면서 화력염전은 밀려났다. 김홍일씨는 "화력염전이 있었던 곳은 송산동 한 곳뿐이었으며, 화력염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지고 곳곳에 천일염전이 들어섰다"고 했다.

공항이야기 - 사진) 삼목염전 옛모습
1960년대 영종도 운서리에 있던 삼덕염전의 모습. 1966년도 인천운서국민학교(현 인천운서초등학교) 졸업앨범 사진 스캔. / 인천운서초등학교 제공

바닷물을 끌어들인 뒤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소금을 얻는 '천일염'방식이 국내에서 처음 도입된 곳은 인천이다. 

 

1907년 인천에 '주안염전'이 운영됐다.

 

현재 미추홀구 주안동과 부평구 십정동 일대 지역에 세워진 주안염전은 국내 최초의 천일염 염전이었으며, 196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폐쇄됐다. 

 

현재는 주안국가산업단지가 운영되고 있다.

자염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천일염전은 1950년대부터 영종도에 우후죽순 들어섰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서도 염전을 조성해 운영할 정도였다.

'건국대학교 70년사'를 보면 "1953년 5월 1일 (중략) 경기도 부천군 영종면 운남리 바닷가에 85정보(1정보는 9천917㎡)에 달하는 염전을 축조하기로 결의했다"며 "영종도가 면적도 넓고 교통상으로나 축조공사를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중략) 1954년 축조공사가 완료돼 가장 우수한 염전이 완공된 것"이라고 돼 있다.

건대 염전이 있던 자리는 현재 '씨사이드파크'가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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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영종역사관 제공
 

염전은 대부분 기능을 잃었지만, 염전 체험관이 운영되면서 염전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영종도 염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실향민'이다. 한국전쟁 이후 영종도에 많은 실향민이 정착했고, 이들은 염전을 축조하기도 하고 소금을 생산했다. 

 

'영종용유지'는 "영종도에는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공사장이 여러 곳 있어 전쟁 난민들이 모여들었다"며 "운서리 삼목도에는 황해도 출신의 김형찬 씨를 선두로 한 염전 매립 공사 종사 세대 70호, 운서리 삼목도에는 평북 출신의 현기인씨를 선두로 한 염전 매립 공사 세대 40호, (중략) 각각 정착하여 지역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고 했다.

경향신문 1959년 3월 16일 자에는 '永宗島(영종도)서 再生(재생)의 길 얻은 避難民集團(피난민집단)'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피난민들이 일년반 동안에 걸친 천주교 구제회의 원호를 받고 그 여력으로 7천만환에 상당하는 염전의 공동주가 되어 이제는 집을 제외하고 한세대에 32만환의 기적을 갖게 된 한 피난민집단이 서해 앞바다 조그만 섬 위에 파라다이스를 건설하고 있다"고 영종도 피난민의 염전 조성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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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염전인 동양염전. 동양염전은 지난해 700t의 소금을 생산했다. 1970년대에는 늙목염전이라고 불렸다.

지난 21일, 영종도에서 50여년간 일한 박병기씨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1933년생 박병기씨는 20대 중반부터 염전에서 일했다. 그는 영종도에 피난민 '염부'가 많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병석에 누워 있는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워 주민 허재봉씨와 며느리 차경자씨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했다. 

 

그는 1950년대 말 홍익대학교가 만든 '금단 염전'을 조성할 때부터 2000년대 초 폐쇄될 때까지 50여 년 동안 한 곳에서 일했다. 

 

그는 "삼목도 쪽에 있는 염전을 '정착지 염전'이라고 불렀고, 실향민들이 많았다"며 "영종도에 있는 다른 염전에도 실향민들이 많았다. 실향민들이 주로 거주한 곳은 삼목도와 신불도였다"고 기억했다.

박병기씨가 일하는 50여 년간 염전에서 일하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긴 나무 양쪽에 소금을 담은 통을 한쪽 어깨에 걸쳐 매는 '목도'방식으로 소금을 옮겼다고 한다. 

 

이후 수레를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경운기로 바뀌었다. 그는 "5월 송홧가루가 날릴 때 소금이 가장 많이 났고, 이때가 가장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고 했다.

박병기씨 아들과 며느리도 염전에서 일했다. 가족들이 모두 염전에서 일한 것이다.

 

며느리 차경자 씨는 "결혼할 때 남편이 목도 일 때문에 한쪽 어깨만 솟아 있어서, 결혼식 예복을 맞추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이어 "'비설거지'라는 말이 있다. 비가 오면 소금물이 비를 맞지 않도록 한쪽으로 옮기는 일인데, 이 때문에 '외양간에 있는 소는 비를 안 맞게 하고 염부는 비를 맞고 일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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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하수종말처리장 인근에 있는 옛 금홍염전 터. 뒤에 보이는 산 바로 앞까지 염전이 이어졌다고 한다. 타일 조각 등 염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차경자씨는 "나를 비롯한 마을 대부분 여자는 염전 판에 장독 깨진 조각을 깔아놓는 '깽팔이'라고 부르는 일을 했다"고 했다.

영종도 주민 수백 명이 염전에서 소금을 내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염전의 주인은 대부분 외지인이었다고 한다. 영종 주민들은 '임금 근로자'로서 일을 했다. 

 

이정국씨는 "영종도에 염전이 20여 개 있었지만, 영종도 주민이 소유하고 있는 곳은 몇 곳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염부들은 일정 임금을 받으며 일하다가 나중에는 소금이 팔린 대로 받는 일종의 '성과급' 형태로 바뀌었다. 

 

전국 소금 생산량이 크게 늘면서 염전으로 인한 수익이 악화했기 때문이다.

'건국대학교 70년사'는 "천일염전은 수익성이 적고 효율적인 재산관리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처분하기로 결의했다"며 "1982년 2월 매도 허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중기획 영종도 염전
2000년대 초 금홍염전 모습. 금홍염전은 영종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김홍일씨가 여러 장 찍은 사진을 파노라마 방식으로 이어붙인 것을 재촬영했다. /김홍일씨 제공

영종도에서 가장 큰 염전은 '금홍염전'과 '건대염전'이었다고 한다. 

 

금홍염전은 현재 영종하수종말처리장에서 인천대교 방면 일대다. 인천공항이 건설되면서 염전은 폐쇄됐다. 다만 염전이 있던 자리는 아직 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일부 염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1960년대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염전이 운영됐다고 한다. 

 

허재봉씨는 "작은아버지가 중산동에서 개인 염전을 운영했다. 다른 기업 염전과는 비교하기 힘든 작은 염전이었다"며 "당시만 해도 작은 개인 염전이 많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없어졌다"고 했다.

현재 영종·용유도에서 염전이 운영되는 곳은 '동양염전'이다. 예전에는 마을 이름을 따서 '늙목염전'으로 불렸다. 

 

동양염전이 있는 용유도는 삼목도 쪽 바다를 제외하고는 인천공항 건설로 인한 영향이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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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하수종말처리장 인근에 있는 옛 금홍염전 터. 뒤에 보이는 산 바로 앞까지 염전이 이어졌다고 한다. 타일 조각 등 염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 때문에 아직 소금창고 등 염전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매년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동양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은 700t이다. 전년도 생산량 550t보다 늘었다. 동양염전은 4명의 염부가 일하고 있다. 다음 달부터 소금을 내는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동양염전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옛날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곳이다. 

 

국내 천일염전이 대부분 결정지 바닥에 PVC장판이 깔려 있는데 동양염전은 타일 모양의 판이다. 과거에는 장독대 깨진 것을 깔았다가 타일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동양염전을 관리하는 천덕기 씨는 "1980년대 초반에 사용했던 시설 등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과거 영종도와 용유도에 염전이 많았는데 지금은 우리만 남았다"고 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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