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봄이 온 줄도 모르고

권순대

발행일 2020-03-16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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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눈먼채 중요한 가치 못보는
가족 이야기 다룬 '터널구간'
지혜롭게 빠져 나오기 위해선
마땅히 경계할 행동 중요하지만
터널 연장 않도록 하는게 더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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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 2월 7일부터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연극 '터널구간'(이상례 작·오유경 연출)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은 삶의 은유를 길과 계절에서 가져오고 있다. 길은 출생과 죽음의 과정이며 계절은 그 과정에서 순환하는 리듬이다. 연극은 한 가족이 터널구간에 갇혀 "봄이 왔는데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있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물론 터널구간과 봄은 관객이 풀어야 하는 은유이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건물주인 아버지의 칠순 잔칫날이다. 비혼인 딸과 아들이 골칫거리인 아버지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여자를 준비한다. 잔치 음식이 식기 전에 결혼을 하라고 명령한다. 대체로 이야기가 잔치 장면에서 시작하면 장례 장면으로 끝나는 것처럼 이 연극은 아버지가 계단에서 굴러 사망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0층 건물이 빚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었던 것이다.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라는 말이 있다.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을 뜻한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해 생긴다고 한다. 연극 '터널구간'은 탐욕에 눈먼 시선으로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삶을 오로지 돈으로 재단함으로써 정작 더욱 중요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터널 비전에 갇힌 사람은 어떻게 그 터널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테세우스의 이야기에서 그 열쇠를 찾아볼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힘겨운 이유는 그 괴물이 미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들어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미궁에서 테세우스 이전에는 살아나온 사람이 없었다. 그 미궁에서 테세우스가 괴물을 물리치고 밖으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실타래 덕분이었다. 미궁에 들어갈 때 풀어놓았던 실타래를 따라 되돌아온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가 지혜의 실이라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터널구간'의 가족에게 지혜의 실타래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아리아드네의 실은 여러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미궁 바깥으로 이어주는 통로이자 연결이라는 점에서 바깥 세계를 망각하지 않게 하는 징표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래서 돌아가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리키는 기호이다. 삶의 가치를 돈으로만 바라보는 터널 비전에 사로잡힌 '터널구간'의 가족에게도 삶의 길에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었을지 모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과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까지 돈으로 사려 했던 순간부터 실타래는 그들의 손에서 멀어져 간 것이 아닐까.

"봄이 왔는데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자탄은 그들에게도 실타래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삶의 길에서 터널이 겨울이라면 터널의 바깥은 봄이다. 그들에게도 봄이 있었고 봄을 만끽할 줄 알았던 것이다. 돈이라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사로잡히지만 않았다면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나 미래형으로 봄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터널을 지혜롭게 빠져나오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연극 '터널구간'은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미궁에 들어갔으나 그들은 되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미궁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궁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괴물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리쳐야 하는 괴물과 동일화한 그는 이제 미궁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한 행동이 터널을 연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못해서 비록 터널 바깥에 나온 것처럼 보일지라도 터널 안에서 진 빚을 갚아야 한다면, 그래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면 진정으로 터널구간이 끝났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만난 봄이 어찌 봄이겠는가. 저만치 봄이 와 있는 길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저마다의 손에 알맞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아닐까.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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