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 깃든 독립정신, 이동휘 기념비 세운다

/아이클릭아트

항일투쟁 앞장… 임정 초대 국무총리
러 블라디보스토크에 8월 설립 예정
고려인 '한민족 정체성' 강화 계기로

이동휘선생
이동휘 선생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혁신공보(革新公報' 1919년 12월 25일 자에 실린 성재 이동휘 선생(1873~1935)의 인터뷰 내용.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추진된다. 경기문화재단은 오는 9월 30일까지 성재 이동휘 선생의 기념비 건립 용역을 진행한다고 13일 밝혔다.

사업은 이념 및 정치적 이유로 외면받은 독립운동가 발굴과 러시아 및 연해주에서 활동한 숨겨진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 의식 확산,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조명을 통한 고려인 사회의 한민족 정체성 강화 등을 목적으로 추진됐다.



기념비는 독립운동가에 어울리는 예술성과 상징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가로 2.5m, 세로 1.5m, 높이 2m 내외로 조성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 파크롭스키 공원 인근에 들어설 예정으로, 설치 시기는 용역 완료 보다 앞선 8월 10일로 예정되어 있다.

1873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난 성재 이동휘 선생은 지난 1903년 5월 국방과 서울을 방어하는 요충지인 강화도 진위 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이듬해에 윤명삼·유경근 등과 함께 강화도 신식교육기관인 육영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1907년에는 안창호·양기탁·이동녕 등과 비밀 결사조직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투쟁에 앞장섰고, 1914년에는 중국 동부지역과 연해주에 분산된 항일세력과 무장력을 총결집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는 동시에 독립자금 모금을 위한 '애국 저금단'과 장교 양성 기관인 '북간도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권위를 갖게 된 1919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았다. 성재 이동휘 선생은 1935년 1월 향년 62세로 숨을 거두었는데 우리 정부는 사회주의 활동을 이유로 독립운동가에서 제외하다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에 추서했다.

/김종찬기자 chan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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