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경인칼럼]벚꽃 말고 이팝나무

봄날 전쟁이 일어난 듯 온천지가 '벚꽃세상'
감염병도 잊은채 '닌텐도 새게임' 출시 불티
가는 곳곳 '일본풍' 정신 혼란·찝찝 했는데
하얀 이팝 꽃뭉치 보며 대체나무 발견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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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 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벚꽃의 개화는 거의 총궐기 수준이다. 길가에 도열한 모든 벚나무들이 어느 봄날 전쟁이라도 일으킨 듯 일제히 꽃잎을 일으켜 세우고 구름처럼 무리를 짓는다. 절정에 이를 때면 도무지 현실세계 같지 않다. 세상천지 오직 벚꽃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벚꽃이 연출하는 장관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끝끝내 정신이 산란하고 마음이 어지럽다. 너무나 '일본적'인 풍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일본풍(日本風)이다. 일본의 문학과 예술에서 벚꽃은 사무라이를 상징한다. 눈보라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은 사무라이의 충정과 지조를 의미한다. 일본 전통 단시 하이쿠도 벚꽃을 단연 으뜸의 소재로 삼지 않았던가. "너와 나의 생, 그 사이에 벚꽃이 있다"고 노래했다.

올해는 정신이 산란하고 마음이 어지러운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게임회사 닌텐도가 최근 출시한 콘솔게임 탓이었을 게다. 이 기업의 나이는 무려 131살. 일본 초대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구로다 내각이 들어서고, 소위 메이지헌법이라고 하는 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된 1889년 그해 개인상점인 닌텐도 곳파이가 화투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게 효시다. 회사 역사가 일본 근현대사의 축약이기도 한 닌텐도가 만든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모동숲) 열풍이 코로나19로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지구촌을 덮쳤다. 전 세계 주요 도시의 오프라인 매장엔 감염의 공포를 무릅쓰고 게임을 구하기 위한 긴 줄이 섰다. 출시 열흘 만에 1천200만장이 팔렸고,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게임으로 떠올랐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예약판매가 시작된 3월12일 판매처 웹사이트 서버가 다운됐다. 발매 당일인 20일 용산의 현장판매처에는 3천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특히 어린이날을 10여 일 앞둔 지난 달 24일에는 제품판매에 나선 대형마트의 웹사이트와 앱이 모두 다운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일본의 게임 '모동숲'은 그렇게 한국을 강타했다. 반일, 배일, 극일 캠페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던 이들이 어린이날 선물을 고대하는 자녀를 위해, 등교하지 못하는 동생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로나블루'를 앓고 있는 자기 자신을 위해 '모동숲'을 사려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긴 줄에 섰다. 지난해 7월부터 들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던 한국사회의 '노 재팬' 운동이 불의에 맞닥뜨린 인지부조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도 일본벚꽃을 대체할 만한, 그리하여 봄이면 반복되는 나의 내적 갈등을 끝내줄 수 있는 아름다운 나무를 '발견'한 건 큰 수확이다. 이팝나무. 이름부터가 우리네 정서와 똑 맞아떨어진다. 5월 중순 뭉글뭉글 부풀어 오른 꽃송이가 마치 사발에 고봉으로 쌓인 흰 쌀밥, 즉 '이밥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立夏)에 꽃피는 나무라 '입하목'이라 했다가 부르기 좋게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윽고 만개하면 하얀 꽃뭉치가 나무 전체를 뒤덮는다. 늦은 봄에 때 아닌 함박눈이 내린듯한데 과연 그 모습은 벚꽃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학명 치오난투스 레투사(Chionanthus retusa)도 '하얀 눈꽃의 나무'라는 의미를 지녔다. 선조들은 이팝나무 흰 꽃이 많이 피면 풍년을, 드문드문 피면 흉년을 점쳤다. 오래된 거목들은 전국 곳곳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됐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만 여덟 그루나 된다.

주위에 이팝나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 지난 주말 모처럼 치러지는 결혼식에 참석키 위해 국립현충원 부근 상도동을 지나 강변북로를 거쳐 청계천변을 달리면서 그제서야 적지 않은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인천에선 송도국제도시 큰길가와 소래포구 가는 길에서 눈에 많이 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방 창문 아래 조경수도 이제 보니 이팝나무구나. 지방정부가 관심과 노력을 조금만 기울이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롭고, 멋지고, 놀라운 계절을 시민들에게 선사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한국사람 아무라도 정신이 산란치 않고 마음에 찝찝함이 남지 않는 그런 봄.

/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 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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