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新 '새 말, 새 몸짓'

[최진석의 新 '새 말, 새 몸짓'·(5)]함께 책을 읽고 건너가자

최진석교수의 '新 새말 새몸짓'
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용기를 내지 않으면 진화할 수 없어
부지런한 자가 감각 극복하고 사유
지혜는 목적지도 없고 도착지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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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독서다. 책을 읽어야 한다.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읽으려고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



인격적인 단련이다. 지적인 수고를 하는 일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nard)는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한다.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이다.

진화는 용기로 빚어진다. 단순한 이 말은 생물의 진화, 문화의 진화, 정치의 진화, 개인의 진화(성숙) 등 모든 다양한 경우에 다 맞는다.

 

그것이 용기인 이유는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편안함을 박차고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발전하고 변화하는 일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 키우고 강화하는 일로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더 많게는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옮겨 가면서 일어난다.

 

모든 진화는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탐험을 떠나는 용기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은 알 수 없어서 항상 불안하고 무섭고 이상하다. 거기는 두려운 곳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자면 두려움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모든 진화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만 일어난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을 좀 풀어서 옮기면 이렇다. "하나의 씨앗을 커다란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은 재주도 아니고 영감도 아니다. 오직 용기이다."

진화하고자 하면 용기를 내야 한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진화할 수 없다. 갖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정처(定處)로 정하고, 마치 선정(禪定)에 들듯이 거기에 편안해 하고 거기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또 그것을 자신만의 진리의 텃밭으로 삼는 한 그것 다음이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도 닿기 힘들다. 

 

장자는 이것을 '정해진 마음'(成心)에 갇힌 형국으로 묘사한다. 이런저런 일들 모두가 이 '정해진 마음'으로 즉시 해석되고 평가되니 이제 깊이 생각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간편한가. 그저 '정해진 마음'에 맞는지 여부에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만 두드리면 된다. 그래서 '정해진 마음'을 가지면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빠진다.

 

진화는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의 몫이다. 감정과 감각은 숙고를 불편해할 정도로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재빠르다. 사유에는 시간과 수고가 들어간다. 당연히 게으른 자는 감각으로 기울고, 부지런한 자는 감각과 감정을 극복하는 지적인 태도로 사유할 줄 안다.

 

감각에 빠져서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음으로 건너가는 과감한 용기가 없다. 그래서 용기란 지적인 태도로 분류된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지적 인내'로 표현한 말은 이치에 맞다.

어디에 마음을 두거나 멈추지 않아야
자유·독립·풍요는 지식생산자가 누려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정해진 마음'을 갖고 그것을 진리로 삼는 일만큼 자신을 멈춰 서게 하는 것은 없다. 지혜란 다른 말로 하면 '멈추지 않기'이다. 

 

이것을 강조한 것으로 '반야심경'보다 더 선명한 것이 있을까. 바로 '바라밀다'이다. 목적지도 없고 도착지도 없다. 

 

그저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것만 있다. 지혜는 바로 건너가기 자체이다. '건너가기'라는 동명사가 지혜이다. 지혜로운 자는 어디에 마음을 두거나 멈추지 않는다. '정해진 마음'을 가지면 스스로는 우뚝 서는 느낌이 드니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는 하늘을 찌른다. 

 

문제는 '정해진 마음'을 갖는 순간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반성 없이 즉각적으로 등장하는 감각만 커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지식의 영역에서는 지식 생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지식 수입자로만 산다. 

 

지식의 생산이 바로 문명의 생산력이다. 지식 생산자의 대열에 끼지 못하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높이에 이를 수 없다. 지식을 수용하는 위치에 빠져 있으면 삶은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생산자가 된다.

 

자유, 독립, 풍요는 다 수입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누리는 일이다. 정치적인 성향이 밴 환경에서 그것은 프레임 씌우기로 나타난다. 프레임 씌우기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는 서로 안다.

 

그러면서도 프레임 씌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어떤 수고도 들일 필요가 없는 데다가 매우 선명하기 때문이다. 

 

'종북 좌빨', '보수 꼴통', '토착 왜구', '좌좀' 등등은 스스로도 곰곰이 생각하기 싫고 상대에 대해 생각도 해주기 싫다는 의사표시이다. 이런 태도는 매우 간명하고 시원하기 때문에 끊기 힘들다. 끊기 힘들면 시원한 것에 만족하다가 숙고하는 정련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개인의 성숙이나 사회의 진화에는 분명한 필요조건이 있다.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다. 정치적 의사 표시를 프레임 씌우기에만 의존한다 할지, 지식의 생산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진화의 길은 멀고도 멀 수밖에 없다.

'정해진 마음'을 약화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정해진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깨달음에 이르거나 진화의 동력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다. 

 

개인의 진화(성숙), 사회의 진화, 정치의 진화에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무위'(無爲), '무념'(無念), '무아'(無我), '정관'(靜觀) 등등의 특별한 태도들은 모두 '정해진 마음'을 약하게 하려는 것들이다. 

 

진화를 궁극으로 밀고 나아가는 모든 가르침에는 이 '정해진 마음'을 해소하는 절차를 항상 가장 앞에 둔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들은 그 가르침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회개이다. '정해진 마음'과 결별해야 예수의 가르침을 받을 바구니가 준비된다. 

 

회개 없이 예수의 신도가 될 수 없다. 부처의 음성을 마음에 담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참회이다. 

 

참회 없이 부처의 음성을 담으려 들면 안 된다. 참회의 과정을 건너뛰고 해탈을 꿈꿀 수 없다. 회개 없이 천국을 꿈꾸거나 참회 없이 해탈을 꿈꾸는 일은 진화를 포기한 채 함부로 사는 막무가내의 인생으로 이끈다.

 

해탈이나 참회에는 다 '정해진 마음'과의 결별이 포함된다. 그런데 '정해진 마음'과의 결별은 경험한 적도 없고 이해되지 않는 곳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것도 감각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는 사유의 활동이다. 감각적 활동이 아니라 지적인 활동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지적 인내이며 용기이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자는 '정해진 마음'과 결별하는 용기를 '자기 살해'(吾喪我)로까지 표현하는 것이다. 장자에게서도 '자기 살해' 없이 '소요유'(逍遙遊)의 자유는 없다. 소요유에 이르게 하는 '자기 살해', 해탈에 이르게 하는 참회, 천국으로 인도하는 회개가 모두 지적인 태도이며 용기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들어가기전 먼저 회개
참회 없이 부처 음성 담으려 들면 안돼
장자도 '자기 살해' 없이 소요유는 없어


개인이나 사회의 진화를 꿈꾸는 자들은 먼저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써서 감각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가벼운 태도를 줄이고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를 함양해야 한다. 

 

지적인 태도를 함양하지 않고는 어떤 종류의 진화에도 관여할 수 없다. 한 조각의 '인식'도 내놓지 못하면서 그저 별 의미도 없이 강하기만 한 '의견'을 내뱉는 허탈한 삶을 산다.

 

지적인 태도는 여러 가지가 뭉쳐서 만들어지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는 바로 지식을 증가시키는 일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내공이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내공이고 용기를 발휘하는 것도 다 내공이다. 겸손도 내공이고 화해도 다 내공이다. 지식의 생산도 내공이고 양보도 내공이다. 우리의 모든 진화에는 지식과 내공이 결부된다. 

 

일은 간단하다. 나와 사회의 진화를 도모한다면 이제 이 두 가지를 모두 닦는 수밖에 없다.

지식과 내공이 잘 닦이면 우리는 지금 이 단계를 넘어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진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다면,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독서다. 책을 읽어야 한다.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읽으려고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 

 

인격적인 단련이다. 지적인 수고를 하는 일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nard)는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한다.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직 지식 생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심한 분열상을 겪고 있는 것은 진화의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독서를 그런 진화가 가능할 정도의 양까지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2015년 UN 조사결과, 한국인의 독서량은 192개 국가 중 166위이다. 

 

이것도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양인데, 해가 갈수록 독서량은 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었다. 문체부가 시행한 2019년 국민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성인은 연간 독서량이 6.1권에 불과하다. 

 

독서를 하지 않으니 지적인 훈련이 되지 않고, 지적인 훈련이 되지 않으니 사회에는 인식의 교환보다는 반성되지 않은 의견들만 난무하고, 정치는 진영과 프레임 씌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식은 생산의 시도가 이뤄지지 않는다. 

 

자신과 사회의 진화를 꿈꾼다면, 우선 독서를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들끼리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 높이를 넘어서려면 최소한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어야 한다.

이런 꿈을 꿔본다. 새 말 새 몸짓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우선 책을 읽는다. 사단법인 새말새몸짓과 함께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독서라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다음 단계로 건너가자. 진화는 용기로 빚어지며, 용기는 지적 인내이다. 지적 인내는 독서로 제일 잘 길러진다. 책읽기가 보통 물건이 아님을 기억하자.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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