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혼술 하는 밤

김서령

발행일 2020-05-22 제18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2020052101000890800043512

국민이 다 아는 단어 '혼술' 즐긴다
몇년 전까지도 생각조차 못했는데
아이를 재우고 영화 한편 틀어놓고
코로나 격리 속 단톡하며 맥주 한캔
처음겪는 변화의 세상 적응해야지

에세이 김서령1
김서령 소설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단어는 글에 쓰지 않는 편인데, 이제 '혼술'은 전 국민이 다 아는 단어 같다. 써도 될 것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해도 말이다. 혼자 마시는 술, 혼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혼술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술이란 그저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마시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오래 전, 내가 꽤 예쁜 집을 계약했을 때 친구들은 축하의 의미로 돈을 추렴해 작은 냉장고를 사주겠다고 말했다. 그 냉장고의 첫 칸부터 끝 칸까지 모조리 맥주로 채우라며 말이다. 뭔가 어른이 된 것 같고, 그것도 대단히 멋진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혼자 작은 소파에 앉아 축구 경기를 보며 맥주 한 캔을 따도 그걸 다 마셔본 적이 없었다. 혼자 마시는 맥주는 쓰고 텁텁했기 때문에 나는 작은 맥주용 냉장고가 탐나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슬그머니 나와 넷플릭스 영화 한 편 틀어놓고 혼술을 한다. 평소엔 살 일 없었던 주전부리도 혼술을 위해 마트에서 하나둘씩 챙기며 밤 시간을 즐길 줄 알게 된 거다. 여윳돈이 생기면 맥주용 작은 냉장고부터 살 거다.

스무 살 때였다. 첫사랑을 여태 드문드문 만나고 있었고 어느 여름, 우리는 아마 피자집에 앉아 지루하고 권태로운 데이트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콜라 한 잔을 앞에 둔 나를 두고 그 애는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술을 주문하는 그 애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덥잖아. 더울 땐 차가운 생맥주 한 잔이 그만이야."

갑자기 그 애가 다 자란 어른인 것처럼 느껴졌고, 또 그래서 생경했다. 그 애가 말을 이었다. 약간은 무르춤한 표정을 하고서.

"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고. 더울 때 생맥주 한 잔으로 시원하다,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러니까 그 애에게도 아직 생맥주는 쓰고, 낯설고, 배부르기만 한, 그저 차가운 물 같은 거였다. 아직 자라려면 한참이 남은 소년이었을 뿐.

어느새 나는 자라, 자발적 자가격리 같은 것, 딱 내 스타일이라며 친구들에게 농담을 한다. 코로나19로 강의가 다 끊겨 신세 한탄을 밤새 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각자 맥주 한 캔씩 들고 앉아 단톡방 수다를 이어가는 것이다. 얼굴 마주 보지 않아도 우리는 건배를 할 줄 알고 상대방의 표정을 읽을 줄 알고 서로의 처지를 눈감고도 이해한다.

"온라인 강의도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젠 할 만해." 누군가 말하면 "정말? 아직 엄두가 안 나서 시작도 못 했는데." 누군가 하소연을 하고 "아냐, 내가 쉬운 프로그램 알려줄게. 나도 하는데 너라고 왜 못 해?" 누군가 도닥이고 "코로나 정국이 끝나도 이런 방식은 계속되겠지? 편하단 걸 모두가 알아버렸잖아." 누군가 겁을 준다. 사실 우리는 다 알겠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한번 변화한 세상은 제자리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가여운 프리랜서들은 그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변화라는 것이 쉽지도 않은데 말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 얼굴과 마주하는 것은, 마치 '혼술'처럼 그간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다. 술친구보다 넷플릭스가 좋아졌듯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일도 자연스러워지겠지.

추억은 내 뒤, 그대로인데 미래는 급하게도 달려온다. 해서 마음이 바쁘다. 어쩌자고 오늘 밤엔 냉장고에 맥주 한 캔 없을까. 코로나가 걷힐 때 미세먼지도 따라 걷혔으면 좋으련만, 세상이 그리 만만할 리도 없고. 날이 한없이 따사로워 더운 일회용 마스크 대신 삼베 마스크만 여러 개 주문했다.

우리 어린 날 그렸던 그림 속 미래는 이런 풍경이 아니었는데, 그런 말은 이제 너무 꼰대스러워 참겠다. 다만 잘 적응하겠다. 서글프긴 하지만.

/김서령 소설가

김서령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