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오후 인천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순찰을 하던 경비원이 분리수거장에서 박스를 정리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인천주택 57% 아파트 5천명↑ 근무
시설개선 건의 "싸가지 없다" 막말
임원 차량앞 이중주차 감시 지시도
"말 안들으면 일 그만둬야" 압박감
"한마디로 아파트에서 입주자대표회의는 왕이고, 경비원은 노예죠."
최근 만난 인천의 한 아파트 경비원 A씨는 경비업무를 '현대판 노예'에 비유했다. 60대 남성인 A씨는 지난달부터 약 1천세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에서 일했다. 경비업무가 처음이었던 A씨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입주자대표회의 임원의 '갑질'이었다.
A씨는 5월 초 관리사무소에 아파트 가로등 시설 개선을 건의했다가 입주자대표회의 임원으로부터 폭언을 들어야 했다. "그게 돈이 얼마인데, 어디 경비원 주제에 '싸가지 없이' 그런 얘길 하냐"라는 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아파트 경비원들은 주차장에 주차된 이 임원의 차량도 감시해야 한다. 주차공간이 부족해 이중주차가 불가피하지만, 자신의 차 앞에는 이중주차를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임원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행태에 부당함을 얘기한 A씨는 결국 자신이 속한 경비업체로부터 사직을 권고받고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인천의 한 2천여세대 아파트 단지에서 일하는 경비원 B씨는 출·퇴근 때 사용하는 자신의 차량을 주차장에 대지 못한다. 입주자대표회장이 입주민의 주차 공간을 차지한다며 아파트 내 도로에 주차하도록 지시한 탓이다.
또 최근에는 초소 안에 햇빛 차단용 블라인드를 설치했다가 "근무시간에 다른 짓을 하려는 것 아니냐"는 회장의 한 마디에 다시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B씨는 "3개월마다 경비 용역업체와 계약을 갱신하는데, 입주자대표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든 보복을 당하고, 일을 그만둬야 한다"며 "회장 등 몇몇 주민들은 경비원을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머슴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5월 10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노동자 고(故) 최희석씨가 주민의 폭언, 폭행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경비원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인천지역 경비원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천시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인천지역에 있는 아파트는 모두 65만6천여호다. 전체 주택 약 114만2천호 중 57%가 아파트다. 이들 아파트에서 일하는 경비원은 5천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현장의 경비원들은 이 같은 갑질에도 '고용 불안'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경비원은 대부분 경비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으로, 업체와 아파트 관리사무소 간 계약을 통해 각 아파트에 파견된다. 관리사무소나 경비 업체는 사실상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선정한다.
통상 이 계약은 1년마다 이뤄지는데, 입주자대표회의에 의해 언제든 계약해지가 가능한 구조라 경비원들은 불합리한 대우를 당해도 자신이 속한 업체나 관리사무소, 어느 곳에도 호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은 '입주자대표회의 등이 경비 근로자의 처우 개선과 인권 존중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현장에선 무용지물인 실정이다.
인천의 경비원 C(66)씨는 "소속 업체에 부당함을 얘기하면 오히려 경비원이 '일 못 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관리사무소 역시 입주자대표회의 눈치를 보는 곳에 그치지 않아 그저 참을 수밖에 없다"며 "갑질에 대응하려면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 고령이라 일자리 구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누가 자신 있게 나설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공승배·유창수기자 ksb@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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