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면의 '고서산책'

[조성면의 '고서산책']'개조냐 개벽이냐' 춘원 이광수의 '조선의 현재와 장래'

1920년대 '민족개조론' 수록 평론집
국가간 우승 열패 이론적 정당화
통찰 불구 일제압정 외면 논란 여지
반대노선 '개벽'은 동학사상 핵심
어변성룡 주창 지금과 비교 허언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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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지혜샘도서관 관장
한때 한국근대문학과 근대사상을 두 개의 패러다임이라는 대립적 구도로 파악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착상은 그럴 듯하나 분화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또 압축고도성장을 거듭한 우리의 실상과 들어맞지 않아 브레인스토밍 단계에서 바로 중단했다. 그때 고민했던 내용이 작가와 근대사의 인물들을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근대화론과 전통론, 도시파와 전원파 등으로 구도를 나누고 묶어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동경대전연의'(1975)와 춘원 이광수의 '조선의 현재와 장래'(1923)를 보다가 문득 여기에 '개벽파(開闢派)'와 '개조파(改造派)'를 추가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원의 '조선의 현재와 장래'(1923)는 고서 시장에서도 희귀본으로 통하는 귀중본인데 고균 김옥균의 글씨와 함께 천운으로 헐한 가격에 소장하게 된 필자의 애장서(품)의 하나다. '조선의 현재와 장래'는 출간된 지 백년에 육박할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조선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광수의 문제적 논문 '민족개조론'이 수록된 평론집이다. 춘원 말고도 개조론을 펴거나 동조한 논객들도 적지 않아 일부 개화파 인물들, 독립운동가에 친일파 인사들까지 두루 섞여 있다. 물론 이들을 무조건 개조파라는 단일 범주로 묶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개벽파도 사정이 다르지 않는데, 동학·증산교·원불교 등의 신종교와 동아시아고전을 추종하는 재야지식인들, 또 이를 따르던 민중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간다.



개조론의 대표주자인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도산 안창호의 개조론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미묘하게 노선과 결이 다르다. 도산의 개조론과 달리 그의 주장은 여전히 친일시비에 휘말려 있다. '민족개조론'은 '개벽'지에 1922년 3월부터 5월까지 연재된 논문으로 자연계의 약육강식과 국가 간의 우승열패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변종 사회진화론이라 할 수 있으며 후일 이광수의 적극적 친일과 변절로 인해 대표적인 친일 논설로 비판받는 글이다.

"민족개조론은 민족성개조라는 뜻이외다"로 시작하는 춘원의 이 논설은 특유의 번득이는 통찰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압정을 외면한 채 투쟁과 저항이 아닌 우리 자신의 반성과 자성을 촉구하고 있으며, 식민지라는 역사적 불행과 민족적 위기의 원인을 일제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 또 민족이라는 것 자체를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로 곧 정치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근대의 발명품이자 허구로 보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관점에서 보면 민족성 자체가 이미 실체 없는 추상적 관념인데 과연 이를 개조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개조론의 반대편에 선 노선은 바로 개벽이다. 개벽은 천개지벽(天開地闢)의 줄임말로 중국의 고문헌인 '삼황기'에 처음 등장하며 동학사상의 핵심으로 증산교와 원불교 등의 신종교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면서 절망의 시대에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복음이었다.

개조론은 제도권 지식인들이 주도하던 세련된 이론이었으나 우리를 자괴감에 빠뜨렸고 우리에게 어변성룡(魚變成龍)의 대운이 열렸다고 하는 개벽론은 궁벽한 초야에 거처하던 재야지식인과 종교 천재들이 주창한 교의였으나 과거의 우리와 오늘날의 우리를 비교해보면 그것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누가 더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숱한 쟁점과 논란들, 그리고 그럴듯한 정치적 주장들도 세월이 가면 결국 진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지혜샘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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