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지재 강담운의 붉은 마음

2020080501000189300009882

김해의 기녀… 시문으로 이름 날려
스무살시절 문인화가 차산 배전 만나
서로의 예술세계 흠모 '뜨거운 사랑'
차산은 10년간 과거 보러 서울 오가
지재의 그리움은 세월 갈수록 깊어져


2020080501000189300009881
김윤배 시인
김해의 기녀로는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옥섬섬과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지재 강담운이 있다. 옥섬섬은 고려시대 감찰대부를 거쳐 문하평리를 지낸 야은 전녹생(1318~1375)으로부터 '김해기녀 섬섬에게 주다'라는 연시를 받는다. '신선이 노닌 바닷가 산은 일곱 점으로 푸르고/거문고 속엔 흰 달이 한 바퀴 밝았네/세간에 옥섬섬의 솜씨가 없다면/뉘라서 능히 태고의 정을 탈 수 있으랴'라는 시에는 섬섬에게 보내는 애틋한 마음이 읽힌다.

지재 강담운(1863~1907)은 평양에서 기녀의 딸로 태어나 여덟 살 때 김해로 옮겨와서 김해 관아의 기적에 오른 것을, 그녀가 남긴 시편을 통해 알 수 있다. '옛날을 추억하며'라는 시에서 '옛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네/유영의 봄에 나고 자랐지/여덟 살에 어머니를 따라/ 배를 타고 남쪽 나루를 건넜네/분성객관에 잘못 떨어져/구란에 이 몸 맡겼네'에서 유영은 평안도의 병영을 이르는 말이고 분성은 김해이며 구란은 기녀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분성객관에 잘못 떨어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최종 목적지가 김해가 아닐 수도 있었다.



열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천애고아가 된 그녀는 스무 살 전후해서 김해의 뛰어난 문인화가인 차산 배전(1843~1899)을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예술세계를 흠모하던 두 사람은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구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이 산중에 있기야 하겠지만'에서 강담운은 지재를 호로 삼으며 세상 끝날까지 배전이라는 산중에 살겠다고 언약했고 배전은 차산을 호로 삼으며 세상 끝날까지 강담운을 품으며 살겠다고 언약했던 것이다.

차산은 문인화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이었다. 사랑이 불타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차산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러 올라갔다. 지재는 '과거 보러가는 차산 낭군을 보내며 강가에서 이별을 읊네'라는 시를 짓는다. '봄바람이 역랑을 일으켜/푸른 강가에 말을 세웠네/먼 이별될까 근심 마시고/힘써 청운의 뜻 이루소서/몸 마른 건 원래 병 때문이니/그립다고 감히 임을 원망하리오/난꽃과 사향 귀한 줄 모르겠으니/계수나무 향기 물들기 바라옵니다'로 끝맺는 시에서 몸 마른 것은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병이 있었던 연유니 근심 마시고 계수나무 월계관을 쓰고 오시라는 염원이 절절한 시다.

그러나 차산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거의 10여년이나 계속 한다. 과거급제는 그 시대에도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지재의 그리움은 세월이 갈수록 깊고 아팠다. 그리움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을 알고 있던 지재는 병을 이기기 위해 여러 편의 연시를 남긴다. '서울로 가는 사람과 이별하며'라는 시에는 차산이 헤어지며 주고 간 귤 하나를 손에 끼는 반지인 듯 아낀다는 문장으로 가슴이 저린다. '시월 강남에 비 내리니/북쪽엔 눈 내리리라/북쪽에서 눈 만나시거든/비속에서 그리워하는 저를 생각 하소서/떠날 때 주신 귤 하나 /손의 반지인 듯 아낍니다/양주로 오시게 되면/돌아오시는 날, 만 개를 드리오리라' 음력 시월이면 양력으로 11월이다. 남쪽에 비오면 북쪽에서는 눈이 내릴 텐데 혹 눈 만나시면 빗속에서 하염없이 임을 그리워하는 지재를 생각해 달라는 시문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차산이 만 개의 귤을 받으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길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재의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가이없다. 그 붉은 마음을 '봄꿈'에서 읽을 수 있다. '수정 주렴 밖 해 기울고/길게 늘어진 버들 푸른 난간 덮었네/가지 위 꾀꼬리 울음 상관하지 말고/그대 찾아 꿈에 장안에 이르렀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 꿈에 장안을 찾아간 지재다.

차산은 과거급제를 포기하고 김해로 돌아온다. 그는 그림에 나머지 생을 바쳤다. 차산은 술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차산 낭군이 술 취함을 조롱함'이라는 시는 미소를 짓게 한다. '비취 주렴의 향기와 호박 비녀/옥가락지 산호패물 값이 얼마인데/훔쳐다가 어느 집에 맡기고 술 마셨는지/철쭉꽃 앞에서 잔뜩 취하셨네요'. 유쾌한 시다.

/김윤배 시인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