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근 칼럼

[전호근 칼럼]백양사 가는 길

금방은 '두시간'·다 온건 '한시간'
이후 난 내안의 시간을 조정하고
공부와 살아가는 법도 함께 배워
비빔밥처럼 삶에도 맛이 있다면
'천천히' 해야 누린다는 걸 깨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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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오래 전 한창 한문을 배우던 시절 나는 1분 1초의 시간을 아끼며 공부에 매진했다. 오죽하면 내가 잠꼬대를 한문으로 한다며 아내로부터 핀잔 아닌 핀잔까지 들었겠는가. 그렇게 한문 공부에 여념이 없었던 어느 겨울, 나는 머리라도 식히고자 장성에 있는 백양사에 간 적이 있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정읍에 도착한 뒤 버스터미널에서 백양사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나이 지긋한 운전기사에게 백양사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더니 버스기사 왈,



"금방 가."

예정된 시간보다 20분 늦게 출발한 버스는 읍내를 벗어나더니 포장도로가 아닌 꼬불꼬불한 산길을 터덜터덜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는데 바퀴에 큰 돌이라도 걸리는지 자주 덜컹거리며 차체가 흔들거리곤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달렸는데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진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시골 노인에게 백양사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물었다. 할아버지 왈,

"다 왔어!"

그런가보다 했는데 막상 백양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더 지나서였다. 그때 나는 시골 사람들의 시간관념이란 도무지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금방이라 하고 한 시간도 더 남았는데 다 왔다고 하니 실제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 나는 시골 사람들의 엉터리 시간 관념에 속아 시간을 허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백양사 입구에 도착한 나는 죽 늘어서 있는 식당 중 한 곳에 들어가 산채비빔밥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때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배가 고팠던 나는 음식이 빨리 나오지 않아 답답한 나머지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윽고 내가 시킨 비빔밥이 나왔다. 음식을 내오던 초로의 아주머니가 연신 물을 들이켜던 내 모습을 보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젊은 양반, 천천히 드시게."

나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풍철이 지난 식당과 거리는 모두 한산해서 마치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는데, 그런 풍경이 그제야 비로소 편안하게 느껴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멀리 백양사가 자리하고 있을 법한 산자락이 그새 굵어진 눈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다.

식탁 위에는 따뜻한 밥이 담긴 큼직한 비빔밥 그릇과 열 종류가 넘는 산나물이 접시에 담겨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느린 동작으로 나물과 양념이 골고루 섞일 때까지 비빔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입 한 입 '천천히' 먹기 시작했는데 혀끝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 맛은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비빔밥에 영혼이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난생처음 먹어보는 맛이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비빔밥은 내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나는 그 까닭을 알아챘다. 그때까지 비빔밥이 맛이 없었던 까닭은 비빔밥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비빔밥을 잘 못 먹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허겁지겁 먹는다면 무슨 맛을 느낄 수 있겠는가. 급히 먹지 말라는 것은 꼭 체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비빔밥을 천천히 먹으며 버스를 타고 오면서 느꼈던 답답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이 금방이라고 여기는 거리와 시간을 내가 멀고 길다고 여긴 까닭은 내 안의 시계가 너무 빠르게 움직인 데 있었던 것이다. 결국 엉터리는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는 어리석게도 아침 해를 일찍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오르는 바보였던 것이다. 이후 나는 내 안의 시계를 조정했다. 금방은 두 시간이고 한 시간 남았으면 다 온 것이다.

나는 백양사 가는 길에 시간 맞추는 법과 비빔밥 먹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공부하는 법과 살아가는 법도 함께 배웠다. 비빔밥처럼 공부와 삶에도 맛이란 게 있다면 모름지기 '천천히' 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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