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

[수요광장]서정시의 비밀 지도

실존적 고투 자기 고백의 서정시는
소수 애호가들 사이에서 창작유통
운명적인 명제는 요즘에 더욱 실감
詩 '저녁의 노래·봄의 과수원' 보면
시간 예술로의 속성 또한 분명하다

2021021401000493900022671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코로나19가 일상화하고 있는 신산한 시대가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상수로 하면서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진단하고 정신적 지남을 제안해야 할 인문학 역시 그 물리적, 심리적 기반이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변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과거처럼 인문학적 지식이나 감수성이 교양인으로서 필요한 인프라로 기능하기보다는 자본 창출을 늘리는 데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지식이 도구적 합리성의 질료가 되어 자본 증식에 기여하게 된 이 시대에 인문학이 추구해왔던 지향은 '지식=자본' 등식으로 왜소화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공동(空洞) 현상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시대에도 하나의 확실한 지표를 제공해 주는데,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이나 제4차 산업혁명 등을 예거하면서 운위되곤 하는 인문학의 위기 흐름일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문학의 위기 혹은 서정시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대안 없는 자기 위안의 형식이기 쉬울 것이다. 서정시가 위기 아닌 시대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서정시는 언제나 소수 애호가들 사이에서 창작 유통되었고, 근대 이후에도 예술 장르 가운데 가장 적은 수요자들을 거느려왔다. 그런데 서정시가 운명적으로 소수 독자를 가진다는 명제는 요즘 들어 더욱 실감을 더해가고 있다. 이는 서정시가 독자의 숫자에 집착했을 때 언어의 이완을 통한 감상벽(癖)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게 해준다. 다시 말해 서정시의 위기가 적실성을 얻으려면 독자 수 감소에 따른 시장에서의 소외현상이 아니라 서정시의 정체성 차원에서 의제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서정시는 시인 자신의 실존적 고투를 내용으로 삼는 자기 고백의 양식이다. 거기에는 한 시대의 주류와 대항하면서 자신만의 외따로운 개성적 사유와 감각을 통해 새로운 상상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인 자신의 열망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서정시의 위의(威儀)를 다시 세워 보려는 고전적 열망과 깊이 닿아 있는 어떤 것일 터이다. 또한 서정시가 시간의 흐름에 의해 완성되고 그것을 향수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시간예술로서의 서정시의 속성 또한 분명해 보인다. 타고르의 시 '저녁의 노래'는 어떠한가. "오래전에, /내가 아직 어렸을 때,/저녁이 그 평안함으로 대지를 덮듯이/그대는 그대의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었다./저녁이 그 마력을 가르쳐준 것이었을까?/이는, 당신이 나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별들이 모두 나타나기에./그대는 내 자신의 숨겨진 보물을 내게 보여주고 당신 자신은 한 마디도 노래 부르지 않고, 오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이는 서정시가 탈환하는 시간이 얼마나 근원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더없는 사례일 것이다.



다음 시를 더 읽어보자.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어요./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어요?/당신이 오신다면 또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어요?"(J. 루미, '4행시 888번') 루미의 언어는 부재를 통한 현전의 가능성을 통해, 텅 비어 있지만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떤 존재를 향한 갈망을 드러낸다. '봄의 과수원'은 꽃과 술과 촛불로 채워져 있다.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소용없겠지만, 혹시라도 '당신이 오신다면' 다른 차원에서 이런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봄의 과수원'은 어떤 이유에서건 '당신'의 부재를 완성하는 사랑의 비밀 지도를 품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서정시는 시간을 대상으로 시간을 원질(原質)로 하는 언어예술이다. 그 순간이란 오랜 시간이 축적되어 나타난 '충만한 현재형'일 테니까 말이다. 그 충만함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가혹한 흐름 속에서 잃어버린 서정시의 원리를 회복하게끔 유도해 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가능한 것 역시 그 안에 호환할 수 없는 예술적 아우라가 출렁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출렁임과 스며듦의 순간이 바로 우리가 서정시의 비밀지도를 읽는 빛나는 특권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