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1)] 잊힌 계몽운동의 현장 '군포 둔대교회'

'상록수' 최용신 선생뿐이었으랴… 신앙만큼 뜨거웠던 배움의 열망
입력 2022-08-07 20:37 수정 2022-08-07 21:33
지면 아이콘 지면 2022-08-0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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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대교회(현재 둔대케노시스교회) 외부 모습.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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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시 도심을 살짝 벗어난 둔대동 반월호수 인근에는 호수의 풍광을 살린 대형 카페와 식당이 자리 잡았다. 그 뒤로 좁은 산길 하나를 따라가면 고택 한 채가 제멋대로 우거진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군포 둔대동 박씨 고택'. 1930년대 군포지역 농촌계몽운동을 이끌던 박용덕 선생의 집이다.



고택을 뒤로하고 한여름의 더위와 습기가 키운 수풀들 사이로 걷다 보면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켰을지 모르는 오래된 건물이 나온다. 이곳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키운 계몽운동의 현장, '둔대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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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박하지만 살아 숨쉬는 둔대교회


1936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53㎡ 1층 규모의 둔대교회(기독교대한감리교 둔대케노시스교회)는 한옥과 서양의 건축사적 특성을 보이는 근대 한옥이다. 일반적인 우리나라 주택이 정면에서 출입하는 반면, 둔대교회는 서양 건축문화의 영향을 받아 출입문이 우측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또한 건축사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보이는 특징일 것이다. 크고 잘 지어진 교회가 흔한 요즘, 얼핏 보면 소박한 외양일 뿐이어서 명패만 없었다면 이곳이 교회인지, 민가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듯하다.

그럼에도 90여년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이 거쳤을 이 공간이 현재의 수준으로 깨끗하게 유지된 데에는 관심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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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대교회(현재 둔대케노시스교회) 외부 모습.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창틀이 알루미늄 창호로 바뀌고 지붕이 기와로 보수됐으며, 입구와 천장, 벽면에 샌드위치 패널을 덧댄 점이 과거의 모습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과거에 머물러 있는 공간이 아닌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일상에서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골조는 이 건물이 세워진 1936년(추정) 당시 그대로 남아있다. 또 1937년 건물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있어 지금이라도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근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겪은 둔대교회


둔대교회는 지난 4월 경기도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에 생성된 유산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버텨낸 우리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건물로만 봤을 때 이보다 더 오래된 건물도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둔대교회가 경기도지정문화재가 된 것은 단순히 지나온 세월을 영광 삼은 것이 아니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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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촬영된 둔대교회 모습. /둔대케노시스교회 제공

둔대교회는 과천 남태령 출신의 박영식씨가 둔대리(현 둔대동)에 정착하면서 손자인 박용덕씨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알려졌다. 1903년 당시 뜻을 모은 주민 10여명이 건물을 세우고 배제학당 교양학부 출신 황삼봉 선생을 초빙하면서 경기남서부권 최초의 근대식교육기관 둔대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그룹홈스쿨링 같은 느낌이겠지만, 1900년대 초 교육시설이 부족했다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둔대동에 세워진 사립학교 느낌에 가깝다. 그러다가 1937년 새로 건물을 세우고 교회와 학교로 운영된 것이 현재 남아있는 둔대교회다.

1936년 건립 추정… 골조 그대로 보존
한옥·서양 건축양식 혼합 소박한 외양


둔대체험학습교실 배홍섭 센터장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교육기관은 감시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데 교회가 그 방어막이 됐을 것"이라며 "당시에는 교회와 학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3·1운동 당시에는 둔대교회가 3·1운동을 주도했다며 일제가 불을 지르기도 했고, 한국전쟁 시기에 피폭된 반월초등학교를 대신해 임시 교사로 활용된 역사도 있다.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야학이 시작돼 1960년대 초까지 운영됐다. 아직도 노년의 주민들은 '둔대교회에서 한글을 배웠다', '공부 배우러 둔대교회를 갔었다'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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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대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연대 미상). /둔대케노시스교회 제공

■ 계몽운동의 성지


우리나라의 계몽운동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설 '상록수'. 그 상록수의 배경이 된 샘골감리교회는 1930년대 군포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이끌던 박용덕 선생이 제공한 땅 위에 섰다.

이 때문에 박용덕 선생의 집 뒤 둔대교회에도 소설 속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을 것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강점기때 교육 감시… 교회가 방어막"
3·1만세운동 주도… 일제가 불지르기도


최용신 선생이 둔대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둔대교회가 계몽운동과 3·1운동의 성지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계몽운동은 지식 보급론이나 문자 보급론과 동의어와 같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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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대교회 청년회가 1961년 1월 15일 발행한 호수마을. 106페이지에 달한다. /둔대케노시스교회 제공

지역 노인들 1960년대초까지 운영 증언
박용덕집 인근 위치… 최용신 연관 추정


둔대교회의 시작이 신학문 교육이었다는 점에서, 또 한국의 초기 선교가 단순히 신학을 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글의 보급과 문맹퇴치에 공헌하고 술과 도박을 청산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둔대교회의 잊힌 역사는 계몽운동의 잊힌 역사와 함께한다.

또 3·1운동 등 민족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에도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 3·1운동의 주역들은 주로 20대 전후의 학생, 청년들이었다. 그 배경은 교회와 학교 등이 조직을 만들기 쉽다는 장점 때문인데, 1919년 3월 30일 군포장터에서 1천~1천300명이 만세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둔대교회가 있어 설명 가능하다.

■ 잊힌 계몽운동


교인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교회 회의록과 각종 사료를 뒤져 둔대교회의 역사를 발굴한 강인태 목사는 "계몽운동은 일제 저항의 정신적 토대이기도 하고, 건국 정신이기도 하다"면서 "그럼에도 잊혀지고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2007년 부임한 강인태 목사 '역사 발굴'
교인 인터뷰·회의록 등 각종 사료 조사


실제 강 목사가 부임한 2007년 이전까지 둔대교회는 단순히 '지역에서 오래된 교회', 조금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100년이 넘은 교회'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강 목사는 주민들과 교인들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둔대교회에서 공부를 했다는 증언이 이어지자, 둔대교회의 역사를 되짚는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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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대케노시스교회 강인태 목사.

그는 "둔대교회의 역사는 계몽운동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잊혀지고 있었다"며 "향토 학예사 등을 육성하고 둔대교회와 계몽운동의 역사를 전하고 싶지만 이마저도 코로나19로 학생들의 방문이 끊어지면서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계몽운동과 3·1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지키기 위해 계몽운동 기념관과 같은 지역사회의 투자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강 목사는 "인근 지역에 개발 압력이 높아 둔대교회와 인근 지역을 팔라고 요구해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때로는 협박도 당할 때도 있지만, 계몽운동의 정신을 기억할 수 있는 곳이 전국에도 몇 남아있지 않아 지켜야 한다"며 "많은 관심만이 100년을 넘게 지켜온 정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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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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