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4)] 성쇠의 복판 꿋꿋하게 자리 지킨 '구 안성군청'

안성의 응집력은 벽돌 건물 만큼이나 굳세고 견고했다
입력 2022-09-18 20:17 수정 2022-09-18 21:04
지면 아이콘 지면 2022-09-19 15면
구 안성군청(안성1동 주민센터) 전경. 뚜렷한 좌우대칭에 붉은 벽돌이 눈길을 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붉은 벽돌의 안성1동 주민센터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좌우로 벽돌 기둥 6개씩, 모두 12개의 기둥은 주민센터 공간과 그 바깥을 구분 짓고, 오각형의 정문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다른 지역 주민센터와는 현격히 다른 모습으로 주민들을 마주하고 있다.

국가등록문화재인 구 안성군청은 1928년 이 자리에 들어선 이후 현재까지 주민들과 관련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 건물의 숨은 역사 속에는 번성했던 과거 안성의 모습과 일제의 야욕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왜곡시켜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작·소출 관리하기 위해 건립
붉은 벽돌 치장 쌓기·좌우 대칭 외관 '압도'
현대식 리모델링 거쳐 현재 주민센터 활용

포섭하기 어려운 안성군 배제하고 철도 건설
번성했던 모습 사라지고 도시 개발서도 소외
교통요충지 얻지 못한 일제 야욕의 피해지역


■ 구 안성군청




일제강점기 안성 일대 평야에서 경작 작업과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1928년 들어섰다. 안성 관아 근처에 있던 안성군청을 이전하기 위해 신축한 건물이라는 배경에서 구 안성군청의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다.

1928년 8월 23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안성군청은 10월 준공예정이고 본관 연와조 80평에 부속사 24평, 군수관사 27평 규모로 지어진다는 예고 기사가 실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안성1동 주민센터 건물 외에 없지만, 1990년대까지는 목조 건물이 남아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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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1동 주민센터 앞에 설치된 등록문화재 설명. 건립 연도와 건립 배경, 문화적 가치 등을 소개하고 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유추와 달리, 구 안성군청은 건립 당시부터 특별히 신경 쓴 모양새다. 지방도시 공공관청은 목조나 비늘판 붙임의 마감으로 지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붉은 벽돌 치장 쌓기로 좌우 대칭의 외관을 가졌다는 것은 당시에도 흔한 형태는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특히 길이쌓기와 마구리쌓기를 교대로 이용해 쌓은 벽돌쌓기 방식은 내력벽식 구조에서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창호 주변의 벽돌쌓기 패턴은 벽돌쌓기를 미학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화재청도 구 안성군청을 조사하면서 건물의 특징이 지방의 한 마을을 '압도하는 풍광'을 자아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구 안성군청과 유사한 형태로 지어져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예천읍사무소(경북 문화재자료 제410호·1932년 건축)와 구례읍사무소(등록문화재 제120호·1936년 건축) 등 소수에 불과한 상황이다.

해방 이후에도 안성군청은 1966년 군청 이전 후 안성읍사무소로 사용되다, 현재 안성1동 주민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때문에 외관은 일제강점기 처음 들어선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내부는 현대식 리모델링을 거쳐 쾌적한 환경에서 주민들의 민원을 처리하고 있다.

그 이전의 형태를 보자면, 내부는 지붕 속에 마루바닥의 다락층을 만들어 문서고와 창고로 활용해왔다고 한다. 2004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목조계단을 철거하고 현재는 폐쇄한 상태다. 후면 중앙부에는 외부로 돌출돼 부속실도 있었으나 철거되는 등 변형이 많이 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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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 안성군청. /안성시 제공

■ 구 안성군청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안성은 조선후기 제조업의 중심지, 상업의 중심지였다. 요구하거나 생각한 대로 잘된 물건을 비유하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안성에 유기를 주문해 만든 것처럼 잘 들어맞는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경기도를 넘어 조선을 대표하던 경제의 중심이었다.

구 안성군청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선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안성 일대 평야에서 나오는 쌀을 비롯한 작물들은 수도권 인구를 부양하고, 전국을 잇는 교통요충지로서 일제 역시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특별하게 신경 쓴 구 안성군청의 외관도 안성군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혹은 일제의 자본과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 중 하나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성의 문화유산을 20여년째 연구한 임근혜 인류학박사는 "당시 안성군 사람들은 똘똘 뭉치는 경향이 강해 일제, 일본사람들이 쉽게 자리 잡지 못했다"며 구 안성군청 건립에 신경 쓴 배경을 설명했다.

임 박사의 설명처럼 일제는 당시 안성군이 가진 경제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섭하기 어려운 안성군 사람들을 피해 개발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철도다. 상대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지역, 그러면서도 바다가 가까운 지역을 찾다 보니, 조선 후기까지 최고의 교통요충지였던 안성을 배제하고 철도를 건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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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안성시장 사진. 안성장을 가득 메운 인파로 당시 안성군이 경제적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안성시 제공

이후 평택역을 중심으로 개발이 이뤄지면서 안성군은 자연스럽게 발전의 외곽으로 밀려나게 됐다.

아쉽게도 현재 번성했던 안성군의 모습은 2000년대 들어 많이 사라진 모습이다. 안성1동주민센터를 중심으로 은행이나 우체국 등 일제강점기의 관공서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지어 외관부터 명확하게 구분되던 적산가옥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구 안성읍의 근대기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은 구 안성군청과 근처에 폐허처럼 남은 정미소 뿐이다.

■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구 안성군청


임근혜 박사는 안성의 문화적 자산에 매력을 느끼고 20여년 전부터 안성의 문화유산을 연구해왔다.

그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 시대적으로도 긴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며 "조선 후기의 상업·수공업의 중심지로서 남은 유산이 많다"고 안성의 매력을 설명했다.

이어 "구 안성군청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근대문화유산으로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며 "현재 남은 것을 잘 보존해서 변화한 시기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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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안성군청(안성1동 주민센터) 전경.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임 박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의 건물 등은 정치적 이유나 주민들의 요구 보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철거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오랜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아파트나 상가를 짓겠다는 생각만 아니라면 문화적 자산으로 보존해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주장이다.

임 박사는 "근대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 등을 열어 시민들과 공유하는, 유형의 자산과 함께 지역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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