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칼럼

[박석무 칼럼] 광주(廣州)와 순암 안정복

입력 2022-11-21 19:44
지면 아이콘 지면 2022-11-2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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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경기도는 실학의 도이다." 오래 전에 필자가 했던 말이다. "광주(廣州)는 실학의 본고장이다." 요즘 필자가 하는 말이다.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가 다산 정약용이고 다산은 경기도 사람이어서 경기도는 실학의 도라고 했다. 경기도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넓어 으뜸 고을이라 칭송받던 광주에서는 실학의 대종(大宗) 성호 이익이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지금의 안산(安山)은 성호가 살던 시대에는 광주 고을에 속했던 곳이다. 그래서 모든 기록에 성호는 광주의 안산 출신이라고 되어 있다.

그때도 광주이고 오늘도 광주인 곳에서 일생을 보낸 순암 안정복(1712~1791)은 토박이 광주 사람이었다. 성호의 직계 제자로 실학자 중에서도 역사학에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한 순암은 대표적인 광주의 인물이다. 지금이야 남양주시로 편입된 조안면 능내리 다산의 고향은 다산 생존 당시에는 광주군이었으니, 조선 실학의 거장들이 살아갔던 곳이 바로 광주였으니, '광주는 실학의 본고장이다'가 옳은 말임에 분명하다. 성호·순암·다산이 광주 사람들이었으니, 광주라는 지역의 훌륭함을 말로 감히 표현할 길이 있겠는가. 문화와 학문의 고장임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탓할 방법이 없는 곳이다. 


성호 역사학 이어받아 조선역사를
과학·실증적으로 연구한 최초 학자


성호도 훌륭하고 다산도 훌륭하지만 순암 안정복 또한 두 분 못지않게 훌륭한 실학자였다. 순암의 문집이나 관계되는 글을 읽으면서 이런 큰 학자가 살았던 광주에 대한 부러움이 커서 순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순암은 숙종 38년(1712)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물론 선대의 고향은 광주였다. 어린 시절 조부를 따라 서울, 전라도, 울산 등지에서 살았지만 20대 초부터 광주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의 선영 아래에 집을 짓고 영주하였다. '텃골'이 본래의 명칭인데 비슷한 '덕골'이라는 뜻으로 '덕곡'의 한자 표시를 했다고 전해진다. 정조 15년이던 1791년 8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순암은 덕곡에 '이택재(麗澤齋)'라는 서재를 짓고 글쓰고 강학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곳에 정착하면서 순암은 35세 때부터 같은 고을의 성호장으로 성호 이익 선생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실학자의 길을 걸었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을 이어 실학의 체계와 학술적 업적을 가장 명확하게 수립하여 다산 정약용에 넘겨준 성호의 학문은 너무 넓고 광범위하여 제자들은 각자가 전문분야로 연구의 업적을 남기는데, 순암은 성호의 역사학을 이어받아 조선의 역사를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연구해낸 최초의 학자였다. 순암의 역사 저술은 매우 방대하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비롯하여 '열조통기(列朝通紀)', '동사보궐(東史補闕)', '동국일사외기(東國逸事外記)', '동사문답(東史問答)' 등 많은 저술이 있다. 그 중에서도 '동사강목'은 고대에서 고려말까지의 통사를 서술한 것으로, 형식과 내용에서 순암의 사관(史觀)과 가치평가가 강하게 들어있는 저작으로 가장 대표적인 저서였다.

'동사강목' 역사관 깃든 대표적 저서
김부식 '삼국사기' 등 비판적 견해
사대관 탈피 민족 정통성 확립 업적


'동사강목'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학의 민족주체 사관과 정통체계를 세워 조선 역사의 정통성을 확립한 큰 업적을 이룩해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정인지의 '고려사', 서거정·최부의 '동국통감', 유계의 '여사제강', 임상덕의 '동사회강' 등의 역사책을 참고하였지만, 이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각각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도 순암의 업적은 대단하였다. '강목(綱目)'이라는 이름처럼 주자의 역사서술 강목체제를 따랐으나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사대사관(事大史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통계(統系)·세년(歲年)·명호(名號)·즉위(卽位)·개년(改年)·붕장(崩葬)·찬시(簒弑)·제사(祭祀)·조회(朝會)·정벌(征伐)·폐출(廢黜)·인사(人事)·재상(災祥) 등을 보면 우리 역사의 체제 안에서 이것을 파악하려는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형식이야 주자를 따랐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민족주체적 사관이 부각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동사강목의 위대함은 여러 가지이지만 특히 정통론에서 정통의 요건을 제시하여 단군-기자-마한-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정통론을 확고하게 세워놓은 점이다. 중국을 섬기는 사대관에서 벗어나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한 순암의 역사학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 확보에 가장 큰 공을 이룩하였다. 실학자들의 역사학은 그런 위업을 이룩했으니, 경기도 광주지역의 공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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