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본적 없는 판타지 속 어른, 몇 번이고 대체될 '다음 소희'

입력 2023-03-08 12:16 수정 2023-03-09 20:50

부채감

負債感

어떤 대상에게 빚을 지고 있는 느낌 

하청·콜센터 업무만 두고 '가해자'만 쫓다 보면
'신자유주의·자본주의 부조' 결론 도달하고 만다
'다음 소희'를 엔딩까지 끌고 가는 원동력은
체면 차릴 줄 아는 부끄러운 마음 '부채감'이다
'체면을 차릴 줄 아는 부끄러운 마음'. 염치와 맞닿은 부채감은 흔히 죄책감과 혼용된다. 죄책감은 원인과 결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한 인과관계 속에 존재한다. 반면 부채감은 인과관계가 모호하다. 분명 가해자가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우리의 마음 한구석을 어지럽힌다. 이 오묘한 감정은 타인을 위해 기꺼이 부조리에 저항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영화 '다음 소희'를 엔딩크레딧까지 끌고 가는 가장 큰 원동력도 바로 이 부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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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 포스터.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특성화고등학교'와 '현장실습'.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는 설정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인 영화다. 소희(김시은)가 한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기로 짜 맞춰진 순간부터 관객은 그를 죽인 가해자들을 은연중에 파악해버린다. 
가해자를 추적하는 게 플롯의 핵심이 아닌 이유다.

'대기업 하청의 하청 구조', 콜센터 업무를 두고 오직 가해자만을 쫓다 보면 결국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빚은 부조리'라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오히려 인물별로 제각각이던 사건을 대하는 자세야말로 소희의 죽음을 해석하는 열쇳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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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소희의 부재에도 세상은 굴러갈테지만
어른들은 자세 고쳐잡아야 한다는 외침
이런 세상에서 염치를 차리려 애쓰는
오유진 형사는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다음 소희'는 염치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을 거칠게 몰아세우지 않는다. 대신, 이런 시스템 아래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개개인들이 각자 자리에서 어떤 자세로 분투하는 게 미덕일지 짚는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소희가 떠나도 소희의 빈자리는 다른 실습생으로 채워질 것이다. "집안 사정도 좋지 않고 문제가 있던 애" 또 다른 소희가 사라진 자리는 으레 계급에 기반을 둔 낙인이 찍힐 것이다. 소희의 부재에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러갈 테지만, 그럼에도 어른들은 자세를 고쳐잡아야 한다는 외침이 장면 곳곳에 녹아있다.

이런 세상에서 염치를 차리려 애쓰는 오유진 형사(배두나)는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소희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감을 향해 주먹을 날리기도 하고, 무작정 교육청에 찾아가 장학사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며 훈계를 서슴지 않는다. 이중 계약서 작성, 실습생 신분을 빌미로 지급되지 않던 인센티브 등 표면상으론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엿보인다. 하지만 부당한 일은 이미 사회에 차고 넘치기에 오유진 형사의 이상 행동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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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소희 둘러싼 인물들이 토로하던 자기연민
반성 대신 죽음의 흔적 지우려는 변명만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마친 '사회적 부검' 
제목이 '우리' 아닌 '다음' 유추할 수 있다
무엇이 '사무직 경찰'이던 오유진 형사를 소희의 죽음에 미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를 투쟁하는 인물로 만든 건 '뻔뻔함'에 대한 저항이다. 그 원동력은 짧게나마 얼굴을 마주 봤던 소희에 대한 부채감이다.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이미지가 실추돼 오히려 우리가 피해를 봤다".

소희를 둘러싼 인물들이 되레 저마다 토로하던 자기연민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우리'에 소희는 철저히 배제돼 있었다. 어느 고등학생의 죽음을 반추해보려는 반성 대신, 죽음의 흔적을 지우려는 변명만 가득한 세상을 마주한 오유진 형사. 그는 죽음의 사회적인 부검을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마쳤다. 영화 제목이 '우리' 소희가 아닌, '다음' 소희인 점을 유추할 수 있는 주요 대목이다.

영화 중후반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면 일부 관객들은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다음 소희'와 전혀 다른 스토리지만,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걸(2017)'이 어느새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댄스 강습소에서 스치듯 마주친 소희와 오유진, 소희 죽음의 전모를 향해 돌진하는 오유진 형사. 그리고 한밤중 영업을 마친 자신의 병원 문을 두들기던 한 소녀와 문을 열지 않던 제니(아델 에넬), 다음날 변사체로 발견된 이 소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들춰가는 의사 제니. 서로 다른 두 이야기는 부채감이란 감정으로 한데 엮인다.

형사와 의사. 둘의 직업이 다른 데서 오는 온도차는 있으나, 저마다 원인 모를 어지러운 마음을 안고 두 소녀의 죽음에 담긴 잔인한 진실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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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처음-마지막 맞닿은 이 영화 보고나면
질문 한가득 안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무엇을 위해 소희는 그토록 춤을 췄을까

소희를 둘러싼 세상 '진실'이 궁금하다면
18일 수원을 찾는 정주리 감독과 만나보자

염치를 논하는 이 영화는 관객 역시 마냥 관찰자로만 두지 않는다. IPTV 계약을 해지하려는 고객과 해지를 필사적으로 방어해야 하는 콜센터 직원. 실제 콜센터 매커니즘을 그대로 보여준 몇몇 장면에선 목 뒤로 서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이렇게 부채감에 압도당한 관객을 이끌고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오유진 형사가 소희가 주문했던 대로 맥주를 시켜 잔에 따르는 장면에선 코끝이 찡해질 만큼 감정이 고조된다. 그렇게 식은땀과 눈물이 서서히 교차하기 시작하는 지점에 다다를 때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맞닿은 이 영화를 보면 질문거리를 한가득 안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무엇을 위해 소희는 그토록 구슬땀 흘리며 춤을 췄을까. 어떤 까닭에 소희는 잠금까지 해제한 아이폰 속 동영상을 마지막 흔적으로 남겨둔 걸까. '댄서가 되기 위해', '춤이 좋아서' 같은 싱거운 이유는 아닐 것이다.

소희의 말투와 행동, 소희를 둘러싼 세상이 가리키는 진실은 무엇일지 정주리 감독에게 직접 물을 기회가 곧 찾아온다. 오는 18일 저녁 6시, 수원시 행궁동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된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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