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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이상과 김해경

입력 2024-09-05 20:09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9-06 14면
김해경 대신 필명 '이상' 사용
경성고등공업학교 수석 졸업
'12월12일' 연재 후 폐결핵 증세
'날개' 발표하며 평단의 관심
한국 현대시 문 최초로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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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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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이상은 1910년 9월23일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4통 6호에서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이상의 본적은 경성부 통동, 지금의 통인동 154번지로 대부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선대로부터 줄곧 살아온 거처로 이상이 태어날 당시에는 할아버지 김병복이 가장으로 집안을 이끌었다. 부친 김연창은 일본 강점 이전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서 일하다가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된 뒤 일을 중단하고 집 근처에 이발관을 개업하여 가계를 꾸려갔다. 이상의 형제는 누이동생 김옥희와 남동생 김운경이 있다.

1913년 백부 김연필의 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성장했다. 이상의 백부 김연필과 김연숙 사이에는 소생이 없어서 조카인 이상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학업을 도왔다. 1917년 이상은 여덟 살 되던 해 누상동에 있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경영하는 동광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동광학교가 보성고등보통학교와 합병되어 보성고보에 재학했다. 1928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에 본명인 김해경 대신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썼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건축과 기술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1930년 '조선' 국문판에 9회에 걸쳐 장편소설 '12월12일'을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했다. 이해부터 폐결핵 증세가 나타나 객혈을 했다.

1931년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이상한 가역반응' 등 20여 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폐결핵의 증세가 악화되었다. 1932년 이상의 성장과정을 돌봐주던 백부 김연필이 뇌일혈로 사망했다. 이상은 폐결핵의 발병과 백부의 죽음으로 커다란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1933년 폐결핵으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조선총독부 기술직을 사임하고 황해도 배천에서 요양했다. 그곳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서울로 불러올려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하면서 동거했다. 그해 8월에 결성된 문학단체 '구인회'의 동인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등과 교류를 시작했고 정지용의 주선으로 잡지 '가톨릭청년'에 '꽃나무' '이런 시' 등을 국문으로 발표했다.

1934년 이태준의 도움으로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게 되지만 15편을 발표한 후 독자들의 항의와 비난으로 연재를 중단했다. 1935년 박태원의 소설 '구보씨의 일일'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는 동안 '하융'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속의 삽화를 그렸다. 그후 다방 '제비'의 경영난으로 폐업한 후 금홍이와 결별했다. 인사동의 카페 '쓰루'를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실패했다. 다방 '69'를 개업해서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명동에서 다방 '무기'를 경영하다가 문을 닫은 후 상천 인천 등지를 유랑했다.

구본웅은 부친이 운영하던 인쇄소 창문사에 이상의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창문사에 근무하면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창간호를 발간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집필에 전념할 수 있어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하면서 평단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해서 경성 황금장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해 10월 새로운 문학세계를 향해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일본 간다구 신보정 3정목 10-1-4 이시카와 방에서 하숙을 했다. 동경에서는 주로 '삼사문학'의 동인 신백수, 이시우, 정현우, 조풍연 등을 자주 만나 문학을 토론했다고 권영민은 밝히고 있다.

1937년 2월 사상혐의로 동경 이시간다 경찰서에 체포된 후 조사를 받다가 폐결핵이 악화되어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졌다. 4월16일 서울에서는 부친 김연창과 조모가 함께 세상을 떠났다. 이상은 1937년 4월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28세로 요절했다.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온 부인 변동림에 의해 유해가 화장된 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되었다. 이상은 한국 현대시의 문을 최초로 열었다.

/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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