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귀국 ②

   

“15년 전 그날, 5살이던가, 4살이던가….”

박준호는 숨을 죽인다.

“왜 대꾸가 없어? 내가 잘못 봤나? 자네 이름이….”



“네, 박준호 맞습니다.”

박준호가 대답한다.

“그렇지? 준호가 맞구먼. 박준호!”

신사가 새삼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손부터 덥석 잡는다. 손이 따뜻하다. 그가 말한다.

“그래, 그때 윤곽이 많이 살아 있어. 대령님 모습 그대로 말이야.”

대령님이라구? 박준호가 고개를 번쩍 든다. 이번에는 박준호가 묻는다.

“대령님이라면…혹시 저희 아버님….”

“그래, 맞아. 박상구 대령님. 일주일 전 우리끼리 15주기 추모회를 가졌었지.…그래, 아버님 제사는 잘 모시고 있는 거지?”

박준호는 눈을 내리깔고 만다. 제사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탓이다. 아니, 영국으로 떠나오기 전까지는 지리산에서 상경한 할아버지와 박상길 관장이 극성스럽게 챙겼으므로 박준호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상복을 입고 큰절만 하면 그만이었다.

한데, 헤이스팅스로 옮기고 나서부터 아버지의 제사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어머니 탓이다. 한마디로 어머니는 지난 일에 대해 연연해하는 성격이 아니다. 물론 일찍이 이민길에 올라 한국보다 미국 사회에 더 길들여진 탓도 있지만 어떻든 타고난 성품 자체가 매정하고 차갑다. 예컨대 할아버지와 마포 태껸 도장을 운영하는 박상길 같은 시댁 식구들과의 교류만 해도 그러하다. 아버지와 결혼 생활을 할 때는 이 주일이 멀다고 찾아가고, 초대하며, 그처럼 가깝게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발길을 끊어 버린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러는 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일까. 박준호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전화 통화를 하는 경우를 보지 못한 터다.

그런 판국이니, 왜 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고 어머니를 닦달할 계제가 아니다. 박준호도 마찬가지다. 대니 라일러 장군에게 그토록 몰입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박준호는 야릇한 배신감을 느껴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내색할 정도는 아니다. 어쩌다 분량보다 많은 음식물을 입 안에 머금었을 때처럼 뱉지 못하고 대책 없이 꿀꺽 삼켜 버리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헤이스팅스로 옮기고 나서 박준호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제삿날을 맞아 뭔가 기념될 만한 행동을 따로 가져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박준호가 어머니에게서 야릇한 배신감을 느끼듯이 할아버지 역시 아버지 존재를 망각한 박준호에게 여간 서운한 감정을 느껴 마지않을 터다. 아무리 어머니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아버지의 아들인 박준호는 달랐어야 한다. 설사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고 그에 상응된 행동을 당당히 실천해 보였어야 옳다. 한데도 박준호는 그것을 흐지부지 넘겨 버렸고,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는데도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꺼낸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자식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기피한 일종의 직무유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귓불이 화끈거리고 뒷목이 뜨겁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버버리 차림의 키 큰 사내, 아니 더 정확하게 서승돈씨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다. 아주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이번 추모 모임에는 모두 100여 명이 넘었으니까, 재작년에 비해 다섯 배로 늘어난 거야. 왜 그런 줄 아니?”

“모릅니다.”

박준호가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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