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귀국 (19)




















 
 

그런 식이니, 박준호 집안 일가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망인의 형이며, 박준호의 아버지인 박상길 공군 대령의 처참한 장례식을 경험했던 터라, 국가의 공권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국가 권력에 대항한 괘씸죄가 얼마나 준엄했으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의 명단까지 따로 작성할 수 있는가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에 아예 얼씬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괜히 집안전통 찾고, 핏줄 찾고, 이웃 정리 찾다가 무슨 봉변당할지 모르므로 뻔히 알면서도 장례식을 피해 지방출장가고, 등산가고, 병원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삼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 장례절차를 솔선수범 관리하는 사람도 있다. 할아버지가 남겨준 지리산 양지골 야생녹차 농장을 계약 재배하는 김분이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박준호의 ‘호’자와 김분이의 ‘이’자를 따 ‘호이야생녹차’상표를 만들기도 한, 보기만해도 적극적이고 활기에 찬 여자다.



박준호가 그녀를 관심있게 보기 시작한 것은 솔직히 이번이 처음이다. 어렸을 때 너무 황망히 당하기만해서 의도적으로 기피한 경우라고나 할까. 아니, 의도적이라기보다 무의식적이라고 해야 더 옳은 설명이다. 뇌리 속 깊은 곳에 늘 그녀 존재가 살아 있었지만,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김분이라는 여자를 멀리 밀어냈다고 해야 옳은 것이었다.

그녀가 헤이스팅스로 보낸 편지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할아버지와 야생차 밭을 산책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고.

그렇다. 만약 관심이 지대했었다면, 그 때 분이누나와 작별의 인사같은 좀 유별난 해프닝이라도 벌였겠지만, 웬걸 박준호는 어떤 식의 인사도 나눴던 기억이 없다. 이번에 헤이스팅스로 ‘호이’ 야생녹차 샘플과 함께 편지를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박준호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일상적인 파트너에 지나지 않았을 터다.

한데 그것이 바뀐 것이다. 뭐랄까. ‘호’자와 ‘이’자를 결합시켰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녀가 또박또박 쓴 편지로 전해 들었을 때의 감흥이 예사롭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 박준호의 고추를 씁씁 따먹다말고, 에이, 망칙해! 갑자기 발기된 박준호의 예민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토옥, 튕겼던 그 짜르르한 아픔….

박준호는 결코 그 야리한 감촉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지만, 어쩌면 그 화인(火印)자국 같은 것 때문에 그녀의 존재가 더 또렷해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 높아서 정복할 수 없는 산처럼 보였지만, 기실은 박준호가 네 살때 그녀가 열 살 이 쪽 저 쪽이었으므로, 기껏해야 6년차다. 6년이면 시루코보다 4살이나 적고, 톰라더 부인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다. 굳이 비교하자면 박준호의 가슴 속에 속절없이 자리 잡아버린 스카이 홍과 한 두 살 차이의 동년배라고나 할까. 그래서일까. 김분이는 박준호와 열정적으로 교접을 나눴던 여인네들과 비교해도 결코 처지지 않는 탱탱한 피부를 가진 여자다. 그만큼 젊다는 얘기다. 물론 미모는 특출나게 내세울만큼 반듯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빠지는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통통해서 볼륨있는 몸매가 평범한 미모를 상쇄시킨다고나 할까.

그녀는 활달하다. 목소리도 까랑까랑하다. 그리고 잘 웃는다. 대화를 나눌 때도 목소리로만 하지 않고, 두 손과 눈동자와 목놀림까지 동원한다. 과히 입체적이다. 그래서 더 사교적인 것 같다. 아는 사람이 많다. 하다못해 수사기관원 일색인 장례식장에서도 호들갑스럽게 수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여럿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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