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귀국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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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준호 씨라고 해야겠다. 그래도 되죠?”

“한참 동생인데, 씨자는 왜 붙여요?”

“그래도, 어엿한 옥스퍼드 대학생이라는데… 어떻게.”



“아녜요, 아직은….”

“그건 그렇고, 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영국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그거요?”

박준호가 뜸을 두었다가, 다시 큰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한다.

“미안하지만, 우리 어머니한테는 내가 한국에 오지 않은 걸로 해 주세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요….”

“알았어요. 안 그래도 박상길 관장님하고 막 통화했으니까.”

그 일도 그렇게 수월히 넘어 간 셈이다. 박상길에 이어서 김분이까지 박준호의 귀국 사실을 감쪽같이 숨겨 준 덕분에 영국에서는 더 이상 박준호를 찾기 위해 이 쪽에 손 쓰는 기색은 없다.

그렇긴 하지만 박상길의 신상에 변화가 생긴 비보까지 알리지 못할 이유가 뭐냐고 김분이가 박준호에게 항의하듯 물었을 때,

“어머닌 지금 임신 중이세요. 좋은 소식이건, 나쁜 소식이건 어머니에겐 일단 쇼크일 뿐 이에요. 산모 나이가 턱없이 많거든요.”

식으로 적절히 얼버무렸던 터다. 물론 그 때만해도 작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자마자 곧장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리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박준호다.

한데 그것이 완전히 뒤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돌연한 사고에 의해 어쩌는 수 없이 침해 당한 일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박준호 자신의 내부 갈등이 이유였고 원인이었다.

일테면 양아버지인 대니 라일러의 음모에 의해 친아버지가 제거되었다는 새로운 사실만해도 그러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공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일종의 ‘설’수준이지만, 그래도 박준호에게는 숨이 막힐만큼 엄청난 충격이다. 생각해 보라.

친아버지를 제거한 혐의자로 지목받는 자와 어떻게 같은 식탁에 앉아 빳빳하게 다림질 된 냅킨을 두르고 숨 죽여가며 아침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단순히 그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정적인 결론이 나온 셈이다.

어디 그 뿐인가.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도 실제적인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그 이유 때문에 헤이스팅스의 어머니와 입학이 결정된 옥스퍼드와 톰 라더 부인과, 마거릿과, 푸른 눈이 한없이 아름다운 리타 라일러와, 그리고 여름 수은주와 비례하여 한때 정상까지 올랐다가 급추락한 시루코 여사까지 깡그리 포기하거나 아예 북북 지워 버리고 서울에 눌러 앉기로 작정한 것이 아닌 것이다.

솔직하게 피력하자면 하다못해 단짝 친구인 한태훈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곳의 은밀한 세계, 이른바 스카이 홍이 자리잡고 있는 만큼의 넓이로 박준호를 지배하고 있는, 뜨거운 열망과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

스카이 섬 중앙도로 건널목에서 만나 비 쏟아지는 벤네비스 고원 숲 속에서 황홀한 결합을 이룬 스카이 홍. 요컨대 난생처음 박준호 스스로 목숨 걸고 얻게 된 유일한 첫 여자가 스카이 홍이다. 지금까지의 경우 하나같이 박준호가 원했다기보다 상대방의 강력한 욕구에 의해 어쩌는 수 없이 맺어진, 이른바 유혹의 소산이 대부분이다.

톰 라더 부인이 그렇고, 시루코가 그러하다. 한데 스카이 홍은 다르다. 상대방이 아니라 순전히 박준호 몫이다. 박준호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갈망하고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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