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귀국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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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턱대고 박준호와 한태훈 옆에 한 명씩 끼어 앉는다. 특히 박준호 옆에 끼어든 40대 마담이 더 많이 취했는지,
“야, 너. 배우같이 잘 생겼다만… 얼굴만 매끈하고, 아래는 바람 빠진 고무풍선아냐?”라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질탕하게 내뱉고 나서, 불쑥 박준호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고, 그것을 주물럭거리는 것이었다.
“이러지 마쇼.”
박준호가 이만큼 물러나는 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손아귀에 가득 잡힌 그것을 휙 소리 나게 비틀어버리는 것이었다.
“아!”
하는 사이, 몸집 좋은 사내가 술집을 불쑥 들어서는가 싶더니,
“야, 너희들 뭐하는 거야?”
꽥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얼핏 느낌에 40대 마담의 기둥서방쯤 되는 사내 같다. 그래서 그런지 다짜고짜 박준호의 멱살부터 치켜든다. 그 때까지만 해도 마담의 손은 박준호 사타구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씹헐! 아직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구!”
술 냄새가 확 끼얹는다. 금세 주먹이 날아들 기세다.
“여보세요, 똑똑히 보세요. 나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잡니다.”
박준호가 또박또박 설명을 했는데도 놈은 막무가내다. 드디어 그 억센 주먹이 날아든다.
박준호가 주먹을 피하면서 공중 뒷발차기로 몸집 좋은 사내를 강타한다.
사내가 악 소리를 냈고, 피가 벽으로 휙 소리 나게 뿌려지는 것이었다. 박준호와 한태훈이 `다리야, 날 살려라' 술값 계산도 없이 술집을 박차고 나와 버린다. 순시 중인 경찰들이 바쁘게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가 골목 끝에서 끝으로 메아리친다.
박준호는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가능하면 외출을 삼간다. 박준호는 서울에 은신처를 마련한다. 한적한 변두리 작은 원룸이다. 김분이에게도 알리지 않은 거처다.
김분이 뿐 아니다. 한태훈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박준호의 원룸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는 가능한 조용한 시간을 향유하기를 원한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한태훈처럼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책에 파묻혀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박준호도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특정 목표 없이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박준호는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 준호예요. 깜짝 놀랐죠? 17만달러이나 갖고 잠적했으니 얼마나 황당하셨겠어요? 하지만 돈은 꼭 갚을게요. 왜 그런 엉뚱한 짓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당장 할 말이 없지만….
언젠가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어요.
제가 어머니 앞에 스스로 나타날 때까지 절 찾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네요. 사랑하는 어머니, 부디 건강하세요.
-아이오와 메이슨 시티에서 박준호 씀
박준호가 아이오와 메이슨 시티에서 라고 편지 끝에 첨삭한 것은 태훈이의 친구가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기 때문이다. 때마침 귀국했다가 미국 아이오와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황급히 몇자 적어 밀봉한 다음 편지를 부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박준호의 편지는 미국 아이오와 메디슨 시티 우체국 소인이 찍혀 영국 헤이스팅스의 어머니에게 배달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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