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강화 사슬재 학살사건
지난달 27일 오후 1시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종합운동장 옆 야산의 한 고갯길. 강화에서 사슬재라고 부르는 곳이다.
강화사람들은 현재의 도로가 뚫리기 전 초지에서 배를 타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고 한다.
사슬재 어귀에 서자 고개 위로 뻗은, 차 한대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 너비의 비포장길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100여m 올라갔을까. 56년전 이곳에서 벌어진 학살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안장섭(82)씨가 손짓을 했다.
안씨는 “여기쯤에 교통호가 있었다”며 고갯길을 따라 도랑처럼 쭈욱 파여 있는 구덩이를 가리켰다. 그는 “새벽 1시께 20명 정도의 민간인들을 2명씩 묶어서 이곳으로 끌고와 앞줄부터 차례대로 구덩이에 집어넣고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면서 “내 차례에 손목에 묶인 끈을 풀고 호를 뛰어넘어 그대로 도망쳤는데 뒤에선 총알이 쏟아졌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안씨는 특사령으로 인천형무소에서 풀려나 강화로 건너오자마자 다시 소년대에 붙잡혔다. 길상면우체국에 감금돼 있다 끌려간 곳이 사슬재였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이 주위는 나무를 모두 베어 허허벌판이었다. 교통호는 삽 한자루 정도 깊이에 너비는 1m가 넘었다.
몹시 추웠던 1951년 1월 초의 어느 밤. 안씨 혼자 그렇게 살아남았고, 그의 사촌형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희생당했다.
안씨는 “시골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은 밥숟가락이라도 들기 위해 땅을 판 것 뿐이지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면서 “살기 위해 다들 부역을 한 건 마찬가지인데 누군 죽이고, 누군 빨갱이로 낙인찍혀 죽어야했다”고 목소리를 떨었다.
이 구덩이가 56년전의 바로 그 교통호였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는 나무와 풀이 무성하고, 깊이가 채 50㎝도 안돼 보였다.
하지만 여러 유족들은 사슬재의 이 구덩이를 1·4후퇴를 전후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장소로 지목하고 있다.
당시 이곳에서 매형의 시신을 찾았던 서덕창(69)씨는 `1951년 1월 7일'이란 학살날짜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씨는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처참했다”면서 “다음날 수십m 길이의 교통호는 150명 정도의 희생자들로 꽉 차있었고, 그중엔 노인과 여자들, 심지어 아기들까지 있었다”고 치를 떨었다.
인천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950년 12월 부역자에 대한 특사령이 내려졌다. 죄를 사하는 조치였지만 대상자 명단은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게까지 전달, 오히려 특사령이 아닌 학살령이 되고 말았다. 사슬재 뿐 아니라 불은면 광성보 등 포구에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후 3시 사슬재를 내려오는 길. 안씨는 “매년 한두번 정도 이곳에 오지만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며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것도 불과 몇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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