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의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4]

경인일보

발행일 2006-11-20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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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형필과 천학매병(千鶴梅甁) >1<

같은 세대의 고유섭(미술사학자)과 송석하(민속학자)가 유형문화재 혹은 무형문화, 민속 등을 학술적으로 조사·정리한 반면,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상속받은 수십만석지기의 재산을 우리문화재의 수집과 보호에 모두 쏟아부었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전형필은 당대 최고의 인텔리였다. 3·1운동 민족지도자에 걸출한 서예가이자 당대 최고의 감식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그를 서화골동의 감식안을 갖도록 키웠고, 한편으로 그 자신도 훌륭한 서예가에 문인화가였다.

전형필은 1906년 종로일대의 상권을 휘어잡던 부잣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라북도 부안의 10만석지기 땅을 포함하여 엄청난 재산을 고서화나 도자기 등의 문화재를 지키는 데에 아낌없이 던졌다. 특히 일본인과 경합이 있을 경우, 값을 묻지 않고 우리 것을 사들였다. 당시에 그를 도왔던 인사중에는 화가 김용진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등이 있었다.

언젠가 충북 괴산군 칠성면에 있는 절터에서 일본인이 마을사람을 위협하여 반출한 보물 제579호 팔각당형부도탑(八角堂形浮屠塔)을 일본으로 반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항까지 달려가 반출 직전에 거금을 주고 사들여왔다. 그 탑은 지금 성북동 간송미술관 정원에 잘 보존되어 있다.

1937년초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죤 개즈비(John Gadsby)를 만난다. 개즈비는 일본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던 영국인인데, 고려청자에 빠져 열렬한 청자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 국민은 물론 일본에서도 청자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청년 전형필은 개즈비가 수집해놓은 국보 제66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靑磁象嵌蓮池鴛鴦文淨甁)과 보물 제238호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를 포함하여 개즈비컬렉션을 전부 손에 넣기 위해 그를 만나려 한 것이다.

개즈비컬렉션에는 후에 국보 제65호로 지정된 청자기린형향로(靑磁麒麟形香爐), 국보 제74호 청자압형연적(靑磁鴨形硯滴)을 비롯하여 각종 청자대접, 접시, 향합, 술잔, 다기 등이 종류별로 다양하게 망라되어 있어서, 미리부터 매물화될 것에 대비한 간송이 때마침 이를 통째로 인수함으로써 간송컬렉션은 일약 `청자의 보고'가 되었다. 그때 지불한 값은 대략 기와집 50채 정도의 값인 거금 10만원이었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최소 250억원은 넘지 않을까?

이렇듯이 확고한 목적의식아래 시작된 간송의 수집품은 그 내용이 급속도로 풍부해져 갔고, 1930년대 중반에 이미 별도의 박물관 건물을 필요로 할 정도로 늘어났다. 그즈음 서울 성북동의 유서깊은 선잠단 부근에 있던 서양식별장이 매물로 나와 간송은 즉각 그것을 구입하고, 거기에 민족미술의 정화들이 수북히 모인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이라는 미술관 건물을 세웠다. 이름을 짓고 현판을 써준 이는 간송의 고미술 스승 오세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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