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선 경기도 박물관장의 '명사와 골동품 이야기'·10]해방후 우리역사 바로세우기 선구자 이름없는 고분서 영웅의흔적 찾아내

경인일보

발행일 2007-01-01 제0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10 김재원과 광개토대왕 그릇 >1<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사업들이 시작되었고, 그중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의 실체를 찾아보자는 취지하에 고고학 발굴이 추진되었다. 그 첫 번째로 경주 노서리 215의 폐고분(제140호분) 하나가 선정되었다. 발굴책임자는 독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벨기에에서 고고학을 연구한 국립박물관의 초대관장 김재원(1909~1990) 박사였는데, 이름없는 자그마한 경주고분에서 유명한 광개토대왕 그릇이 발굴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요즘도 중요한 고고학기사는 보통 신문 1면에 실리고, 9시방송에 톱뉴스로 보도되고 있을만큼 국민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높다.

지정학적으로 보아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는 우방이 되어야 한다. 지금이 왕조시대도 아니고, 더구나 나라의 크기가 국가관계를 좌우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광개토대왕이 누구인가! 삼국시대 최고의 영웅 아닌가? 그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린 비석이 지금의 중국땅 집안에 서있다고 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세력이란 말인가. 참으로 소가 웃을 일이다.

일본도 기회만 있으면 한국역사의 상당한 부분을 폄훼 왜곡하여 그들의 대륙진출 야욕의 교두보로 삼으려 하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비밀리에 광개토대왕 비문을 조작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일본은 고분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의 속국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지만, 조선시대에 대마도 종주는 한양에 조공을 바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발굴인데, 규모도 작고 초라한 신라고분에서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보이는 것과 같은 체의 글자가 새겨진 청동그릇이 출토되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경악했다. 당시의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여서 매번 왕자 등을 인질로 보냈다. 파견된 인질은 왕이 죽거나 하면 돌아오는데, 광개토대왕그릇은 대왕이 412년에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치른 뒤 경주로 돌아온 신라왕자가 죽자 무덤에 넣어진 유물로 추정된다. 아마 인질로 가있던 기념으로 광개토대왕그릇을 갖고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그 크기와는 상관없이 이 고분은 신라고분 연대추정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왔다. 후에 '호우총-은령총'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고분은 부부를 묻은 표주박모양의 쌍분이며 그 연대는 5세기 전반에 해당된다.

김재원 박사는 참으로 복이 많은 관장이다. 일복이 많아 국립박물관 관장만 25년을 했고, 발굴복이 있어 좋은 유물을 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인복도 따라와 주변에 인재가 많았다. 이 호우총 발굴도 시작할 때에는 주변에 발굴경험이 있는 한국인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게 큰 문제였다. 그때 도움을 준 이가 현재 교토대학 명예교수로 있는 아리미쓰(有光敎一, 1922~)였다.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면서, 한국에 와있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추방되거나 돌아갔다. 문제의 아리미쓰는 박물관 인수인계와 발굴지원을 위해 특별히 잔류할 수 있었고, 이후 한국고고학 전문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경인일보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