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
인도차이나의 석양 ⑨

"서승돈이 바람 피우는 상대 여자가 누군줄만 알면 붙잡고 눈물로 하소연하겠는데…… 어찌나 애처로운지, 정말 도와주고 싶더구만."

그리고 김상도 회장이 홍주리를 이번에는 시선을 걷지 않고 그윽히 바라본다. 그녀는 그 시선을 뜨겁게 느낄 수가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따갑다 못해 얼굴 피부가 느물느물 가려울 지경이다. 그래도 그녀는 본 체 만 체 더욱 초연한 표정을 연출한다.

'아무리 그래 봐라. 그 따위 덫에 걸리나. 어디서 무슨 얘길 주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호락호락 안 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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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리가 더 새초롬한 얼굴로 붉은 노을 대신 납빛 어둠이 서서히 깔려 오는 하늘과 보랏빛에서 가지색으로, 그리고 다시 먹물색으로 변해 가는 야자나무 숲을 본다.

'정말 보통 여우가 아니야. 그 정도 찌르면 아프고 비명을 지르거나, 어쨌든 두 손을 들게 마련인데, 이건 도대체 옴쭉도 하지 않으니…… 단수가 높은 건지, 영민한 여우라서 그런지…… 하지만 내가 지금 왜 서승돈을 거론하는지, 그 이유는 알겠지.'

김상도 회장이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마음 같아서는 서승돈을 전자사장에서 내려앉혀 뉴욕 본부장으로 보내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더라구. 부부가 해후해서…… 원만히 화합하면 오죽 좋아? 애들한테도 좋구……."

텍사코 윌리엄 회장 업무 담당 비서가 서울에 왔었던 그날 밤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듯이 김상도 회장은 새삼스럽게 입을 앙다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애틋했으면 그랬을까. 그처럼 바쁜 스케줄을 아니, 그토록 간곡한 부탁마저 깡그리 묵살할 수 있었을까. 뭐라고 그랬었지? 그래, '프라이버시거든요.' 그렇게 말했었지. '좋아, 그게 뭔지 모르지만 내가 다 사지, 아주 비싼 값으로' 김상도가 대꾸했지만 웬걸, '그건요. 돈으로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거예요, 회장님.' 홍주리는 그때 그런 식으로 무참하게 쐐기를 박았어.

'한데 그 시간 그녀는 서승돈을 은밀히 만난 거야. 뭐, 음악회를 갔었다구? 회사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 때문에 사장단이 총동원된 마당에, 두 사람은 한가하게 손잡고 앉아 음악을 감상해? 그리고 남산 오솔길을 호젓하게 산책했다구? 빌어먹을 자식!'

한데 이상하다. 서승돈이 홍주리를 끼고 어두운 산길을 걸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아니, 그런 짜릿한 광경을 뇌리에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동요하기 시작한다. 기실 웬만해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 아랫도리 아니던가. 오죽하면 그걸 잠에서 깨워 일으킬 때마다 악전분투하겠는가. 하춘지만 해도 입 안에 넣기도 하고, 쪽쪽 빨기도 하고, 쩝쩝 핥기도 하고, 가슴에 문지르기도 하고, 머리칼로 감기도 하고…….

그렇게 반 시간 족히 공을 들여야 마지못해 비실비실 일어서서 이윽고 기지개를 켜곤 하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인가. 까딱 잘못하면 픽, 쓰러져 다시 깊은 잠에 빠질 우려가 더 많았으므로 행여 선반의 물건인 양 작은 진동에도 떨어지지 않을까. 간신히 끼워 놓은 헐거운 전기 코드처럼 아예 빠져 버리지 않을까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절절히 신경 써 주었던가.

한데, 이건 위태위태한 상황이 아니다. 십 년 전 아니 이십 년 전 그 왕성했던 시절의 위력이다. 어떤 외부의 방해와 압력을 받아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거대한 힘을 과시하던 시절, 일단 일어섰다 하면 기어코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던 그 번창일로의 시절…….

지금이 바로 그러하다. 두꺼운 문창호지라도 뚫어 버릴 것 같은 그 시절의 힘이 그대로 살아서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는 것이다. 뭐랄까. 장작개비 같은 것에 부드러운 스펀지를 발라 놓은 것 같다.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흡사 한 방에 성벽을 날릴 거대한 대포를 앞세우고 진군하는 혁명아 사파타처럼 보무도 당당히 김상도 회장은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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